2005. 8. 27. 15:43

옛 그림의 여백 (오주석 님)

우리 옛 그림에는 서양화에 없는 여백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화가가 그림 바탕을 전혀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현상적으로는 ‘나머지 흰 부분’ 화면의 ‘빈 부분’ 이다. 그러나 여백은 정말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백에는 그려진 형상보다 더 심오한 것이 더 많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최상의 화가는 형상을 위하여 여백을 이용한다기보다 오히려 여백을 음미하기 위하여 형상을 그린다.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가 바로그대표적인 예이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흰 것을 알고 검은 것을 지키면 천하의 모범이 되리라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고 하였다. 이 말은 물론 그림에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도道에 관한 하나의 비유였지만, ‘지백수흑知白守黑’ 은 그 뜻하는 내용의 절실함으로 인하여 곧 서예 작품에서 구성의 근본 원리로 확립되었다. 그리고 서예의 원리는 그대로 옛 그림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전통사상에서 백색은 순양純陽의 빛깔이며 흑색은 순음純陰의 빛깔이다. 따라서 양陽은 형이상학적인 원천을 상징하고 음 陰은 형이하학적인 내용을 이룬다고 할 때 여백이 가지는 심오한 뜻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백은 그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각에도 여백이 있다. 조각이 3차원 속의 덩어리라면 그것을 둘러싼 공간은 여백이다. 공간이 없는 덩어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공간이 덩어리를 에워싸고, 덩어리와 어우러져 서로 침투하고 서로를 낳아야 한다 음악에도 여백이 있다 누군가 ‘음악은 침묵이라는 하얀 백지장 위에 소리라는 붓으로 그려낸 그림’ 이라 하였다. 또 허공을 맴도는 음악이 그대로 얼어붙으면 조각이 된다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침묵의 여백이 조금이라도 더러워지고 손상되었을 때 심금을 울리게 하는 음악이란 있을 수 없다.
여백은 궁극적으로 마음의 여백이다. 우리 겨레의 큰 자랑거리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속칭 에밀레종의 한 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그 첫머리에 새겨져 있다.

대저 지극한 도道는 형상 이외의 것까지 포함하나니 보아도 그 근원이 보이지 않으며, 참으로 큰 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진동하나니 들어도 그 울림이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설假說에 의지해 펼쳐서 참 진리의 심오한 뜻을 보며, 신종神鐘을 매달아 올려서 한 진리(일승一乘)의 둥근 소리(원음圓音)를 깨닫는다.

우리는 에밀레종의 둥실하고 어질기 그지없는 울림을 듣고 감격한다.
저 종의 당목撞木이 당좌撞座를 때리는 순간, 마치 우주의 중심이 울리는 듯한 숭고함과 장중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둥근 소리가 무한히 멀리 퍼져 나가고 또 무한히 작아지면서 끝없는 동심원同心圓의 파문을 긋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중생을 향한 음音의 여백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그 무음無音의 여백이 없었더라면 에밀레종 소리 또한 잡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천자문千字文』은 “하늘은 검붉고 땅은 누렇다天地玄黃”로 시작된다.
하늘 빛은 푸른 것이 아닌가? 아니 사실 하늘 빛도 늘 푸르지는 않다. 그것은 잿빛으로 흐려지는가 하면 황사黃沙가 올 때에는 땅처럼 누레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검붉다’ 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모든 빛이 사라진 한밤중에 고개를 들어 천공天空을 바라보라. 하늘은 검다. 그러나 그 검정에는 끝없는 우주의 광막함으로 이어지는 깊이가 있다. 그것이 ‘검붉음(玄)’ 이며 ‘유현함’ 이며 바로 진정한 하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했다. “이 두 가지, 즉 유有와 무無는 ‘같음’ 에서 나와 이름을 달리한다. 그 ‘같음’을 일러 현玄이라 한다. 유현하고 또 유현한 것, 이것이 모든 미묘함이 나오는 문이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라고. 보아도 보이지 않고(이夷) 들어도 들리지 않고(희希)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미微) 저 도道의 아득한 실상實狀은 ‘긴 끈처럼 면면히 이어지지만 그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다繩繩不可名’ 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옛분들은 자연을 겉태로 보지 않고 그 마음으로 보았다. 특히 하늘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하늘은 지극히 큰 것으로 온갖 생명과 도덕의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양화법이 도입된 이래 푸른 하늘이 화폭에 그려지게 된 것은 회화 기법의 발전이 아니라 회화 정신의 쇠퇴였다. 진정한 하늘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오히려 하늘의 가장 큰 특징은 ‘비어 있다는 점’ 에 있으니, 그저 화면에 하늘을 위한 여백을 남겨두는 행위야말로 진정 하늘을 잘 그리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옛 그림의 여백 사용은 자연의 묘리妙理를 파악해서 얻어낸 최상의 기법이요, 발상이었다. 왜냐하면 여백으로 드러나는 하늘과 물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그것의 외면 형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과 물의 본질적인 속성은 그것이 가지는 무한한 공간적 확산성, 그리고 그 공간이 하늘을 나는 새와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등 모든 생명체에 부여하는 무한한 자유에 있다. 이 공간과 자유는 그림의 바탕을 그대로 이용하고 하등의 인공적 작위作爲를 가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면 땅은 어떠한가? 땅 또한 만물이 그에 의지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삶의 공간이 아닌가? 그렇다! 그래서 〈세한도〉에서처럼 땅도 몇 줄의 가는 선만으로 표현된다. 특히 겨울산수화에서 눈을 그릴 때는 흔히 ‘땅을 벌어서 눈을 삼는 借地爲雪’ 것이다. 눈을 그리는 방법엔 원래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양화에서처럼 눈이 쌓인 부분에 직접 흰색을 바르는 방법(부분법敷粉法)이고, 다른 하나는 거꾸로 눈이 없는 다른 부분을 그려서 그림의 흰 바탕에 눈이 쌓인 것처럼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방법(유백법留白法)이다. 이 가운데 유백법을 격조 높은 기법으로 보았던 오랜 전통은 자연을 보는 옛 사람들의 관점을 분명히 말해준다.
텅 빈 하늘이 있은 후에야 휘황한 달이 아름답고, 아지랑이 서련 아득한 공간이 있어야만 그 앞에 뻗어난 한 줄기 댓가지가 풍류롭다. 보이는 형상은 비어진 여백 공간과 끊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무는 유를 낳고 유는 무에 의지한다. 아니, 유는 드러난 것(현顯)이고 무는 감추어진 것(은隱)일 뿐이다. 그러므로 빈 공간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여백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히 크고 넓어서 그려낼 수 없는 그 무엇을 상징하고 있다. 음악에서도 극히 여린 소리와 긴 침묵의 순간에 숨죽이는 더 큰 감정의 떨림이 있고, 무용에서도 정중동靜中動으로 가만히 들어올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미세한 동작 하나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네모진 화폭 속에서 어느 한 부분도 다른 한 부분만큼 중요하지 않은 곳은 없다. 형상이야 있건 없건 화면에는 고르게 예술가의 혼이 떠돌고 있으며, 특히 여백 속에는 화가의 못 다한 마음이 담겨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어딘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바림이 베풀어져 있다는 사실도 비로소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되고 거기에서 다시 옛 사람들의 여유롭고도 쏠쏠한 마음 씀씀이를 이해하게 된다. 흔히 ‘마음의 여백’이라는 말을 한다.

옛 그림에는 여백의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