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서 소근소근/비처럼 음악처럼'에 해당되는 글 121건

  1. 2016.09.07 옥수수 밭을 거두며
  2. 2012.05.11 봄나물을 즐기기
  3. 2012.05.08 옆산을 가로질러 낸 끔찍한 흉터를 보며
  4. 2012.04.25 손자 녀석과 비지스의 DVD 함께 보기
  5. 2012.04.25 어론리에서 새봄 맞기
  6. 2012.04.12 자연과 더불어 살기
  7. 2012.04.09 곤줄박이 보금자리 마련해 주기
  8. 2012.02.24 EBS의 최재천 교수의 특강, 다윈의 진화론을 보고…
  9. 2012.01.12 "목수 김씨의 나무 작업실"을 읽고
  10. 2011.06.30 우연 또는 필연-3
2016. 9. 7. 08:02

옥수수 밭을 거두며

올해는 텃밭에 심은 옥수수를 예년에 비해 조금 일찍 거두었다. 적은 양의 씨앗을 구하기가 곤란하여 봄에 모종을 사서 일찍 심은 탓이다. 모종을 심자마자 날이 사정없이 가물었고, 올해도 역시 화학비료는 전혀 주지 않아 주변의 밭에서 크는 옥수수에 비해 초등학생을 보듯 꼬마처럼 작고 연약하게 자랐지만, 기특하게도 작게나마 옥수수는 모두 달렸다.

내다가 팔 옥수수가 아니니 작지만 건강한 열매를 거두는 느낌은 언제나 각별하다.

 

모종을 심을 때 보면 늘 몇 개는 키가 아주 작거나 이파리가 신통치 않은 놈들이 있고, 작은 포트 한 구멍에 서로 비비며 크는 녀석들도 있어서 밭에 옮겨 심을 때 쪼개어 심기도 한다.

뜯어 놓고 나면 아무래도 엉겼던 뿌리가 끊어지면서 빈약하고 시원치 않게 되니, 이 녀석들이 제대로 커서 뭐가 달리려나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

 

모종이 자리를 잡고 크기 시작하면 곁순이 심하게 나와 손질을 해 줘야 하기도 하고, 유난히도 못 생겨서 제대로 못 자라며 눈치를 받게 되는 놈들도 있다. 밭은 돌보며 그런 녀석들에게 눈길이 더 가게 마련이다. 이놈들이 과연 내가 흘린 땀 값이나 하려나 하는 마음으로.

 

올해에도 신통치 않던 녀석들도 작지만 옥수수 모양을 갖춘 열매가 달렸다.

아무리 못생기고, 상대적으로 빈약하더라도 결국 자손을 남기려는 타고난 본능은 2세를 남긴 것이다.

 

인간세상도 사실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공부를 조금 못한다거나, 키가 또래보다 작거나, 인물이 처진다고 부모들은 안달을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무리수를 동원하기도 한다.

과연 누구의 행복을 위한 조치일까?

 

어느새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넘기고 있는 손자녀석에게 기대하는 수준을 어디에 두어야 옳은 것일까? 학원에 묶어 놓아, 성적을 조금 더 올려보려고 하는 부모의 스트레스가 과연 원하는 결실을 거두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려나? 녀석의 키가 크는 만큼이나 의문도 함께 커지고 있다.

 

못난 옥수수도 결국 나름대로 열매를 맺듯이 사람도 역시 제 몫은 하게 마련이거늘. 이 역시 “Let it be”하며 기다리기가 정답으로 여겨진다.

 

2012. 5. 11. 16:53

봄나물을 즐기기

지난달 마지막 주말, 오랜만에 풍암리 장날을 맞아 구경을 나섰다.

음력으로 삼월 중순인 내 생일 무렵에는 두릅 새순이 장에 나온다. 아내는 지금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내 생일 무렵이면 두릅을 삶아 봄소식을 실감하게 해주고 있다. 향긋하고 약간 쌉사름 하면서도 개운한 느낌의 두릅은 강원도 귀둔리에서 군대 생활을 하던 시절 뒷산에서 따서 실컷 먹을 수 있었다. 가시가 돋친 허연 두릅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는 산 비탈도 있었으니 그때는 귀한 줄 도 모르고 먹었다.

언제부터인가 시장에서 파는 두릅은 거의 잎이 한 뼘이 넘게 자란 것들이 팔리고 있다. 귀하다 보니 크게 키워 팔아보려는 속셈이 깔린 탓일까? 아내는 순이 덜 자란 놈을 구한다며 좌판 여기저기를 기웃거려 엄나무 순, 봄나물을 섞어 한 봉지를 샀다.

 

지난해 가을에 옆 개울너머에서 옮겨 심어놓은 두릅은 이제 겨우 허리 높이만큼 밖에 자라지 않았는데, 두릅나무를 직접 나무에서 따보지 못한 아내는 새순을 따내면 나무는 어찌되느냐고 궁금해 한다. 새순을 따내도 곁에서 작은 곁순이 나와 죽지는 않는다고 하니 미안해서 어찌 따겠느냐고 되묻는다.

지난해에 동네 이웃 어른께서 지나는 길에 건네 주고 가셔서 앞마당에 심었던 엄나무 두 그루는 추운 겨울을 잘 넘기고 어느새 어린 애기 손바닥 같은 예쁜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개 두릅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봄이 되면 두릅만큼이나 사람들의 손에 시달리는 가엾은 나무지만, 한겨울 이파리를 모두 떨군 후에도 돋아난 가시를 반짝이며 예쁜 모습을 보여 주기에 앞마당에 자리를 잡게 된 녀석 들이다  

 

추운 겨울을 견뎌 내고, 힘겹게 돋아내는 새순을 따낸다니 잔인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무자비한 폭행을 나무에 저지르는 셈이 된다. 고로쇠 나무 수액을 훔쳐먹고, 봄나물을 뿌리 채 캐내고 하면서 사람들은 나만 건강해 지겠노라 하면서 조금 덜먹어도, 안 먹어도 지장 없는 먹거리를 장만한다고 주변을 사정없이 휘저으며 살아가고 있다.

즐기기 위해 산 생명을 해치는 짐승은 사람 밖엔 없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먹는 걸로 건강을 지켜보려는 몬도가네식 정신병 환자 수준의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어느새 넉넉히 먹고 살만해진 탓일까 TV프로에서도 전국의 식당 순례를 하며 보양식이네 맛을 내는 비법이네 뭐네 하며 결국은 살생을 부추기고 있다.

나 역시 지난 겨울 고라니나 토끼 같은 뒷산의 주인이 겨우 살려 놓은 소나무 순이나 딸기 잎을 따먹어버려 적지 않게 죽게 된 피해자이고, 서로 Win-Win 절충할 수 있는 경계가 어디일까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조금씩 물러서서 양보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그려보며 봄날을 보낸다.

2012. 5. 8. 17:38

옆산을 가로질러 낸 끔찍한 흉터를 보며

지난 겨울, 홍천 집 옆의 산 주인은 벌목을 핑계 삼아 집 뒤의 더덕 밭을 중장비로 마구 뭉개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내버렸다. 개울 옆 소나무 세 그루를 베어낸 자리가 아직도 휑하게 느껴지는데, 잣나무와 낙엽송을 수없이 베어낸 후 산허리를 가로질러 트럭이 지나갈 길을 낸 것이다. 인간은 이래도 되는건가 끔찍한 흉터처럼 도로가 난 자리의 무너져 내린 흙더미, 자갈더미가 올 여름 장마철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불안해 보이기만 한다. 산아래 농사를 짓고 있는 이웃 어른이 농사짓는데 그늘이 지니 벌목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한다. 농사를 짓기에 그늘이 얼마나 지장을 주는지 모르지만, 밭에 심은 농작물을 다만 얼마라도 더 거두어 보겠다는 욕심이 산 기슭 한 면을 깡그리 베어내게 된 결과를 낳았다. 수십년된 낙엽송을 빡빡 밀어내듯 베어낸 급경사의 산은 몇 십 년은 기다려도 복구가 될지 모를 흉한 모습으로 남았다. 이른 새벽마다 집 주변에서 아침 잠을 깨우듯 지저귀던 새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과연 산의 주인은 누구인가?  몇 년 전 인디언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법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읽고 나서 면역력이 전혀 필요 없던 환경에서 행복하게 삶을 이어오던 인디언에게 컬럼버스는 지옥으로부터 찾아온 악마였던 것이다. 전염병을 퍼뜨리고, 위스키로서 파멸의 길을 열어 주고 자연을 파괴하고...’ 라고 적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며칠 전 읽은 도종환님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에서 대지에 절해야 한다라는 글이 가슴에 와 닿았기에 여기에 옮겨 놓았다.

 

자연은 자연의 것이다. 산은 산이 주인이고 나무는 나무가 자기의 주인이다. 대지는 대지의 것이고 우주는 우주 그 자체가 주인이다. 인간의 것이 아니다. 강과 땅과 산이 자기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인간위주의 사고방식이다. 인간이 자연의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건 이기적인 태도다. 오만한 자세다.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도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우주의 일부이다. 인간이 소우주이면 산도 토끼 한 마리도 떡갈나무도 개미도 붓꽃도 저마다는 다 소우주를 이루고 있다.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잠시 같이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잘 해야 한다. 삼보일배(三保一杯)하는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대지에 절을 하며 겸손해지고 대지에 절하며 사죄해야 한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

주제넘게 강을 파헤치고, 산허리를 잘라 고속도로를 내고,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인간의 앞날을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 역시 자연이 아닌가?

 

2012. 4. 25. 17:41

손자 녀석과 비지스의 DVD 함께 보기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손자녀석은 오며 가며 차에서 듣던 비틀즈의 히트곡 모음집의 곡조를 거의 외우는 수준에 도달을 했다. 고등학생 정도는 되어야 들을 수 있는 곡이 팝송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요즈음 워낙 TV 같은 방송매체를 쉽게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다양한 음악을 거름막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결과가 아닌가 한다.

몇 년전 중국 출장 길에 우연히 호텔 앞의 매장에서 샀던 불법 복제판 몇장 중에 비지스의 라스베가스 그랜드 호텔 공연실황 “One Night Only” 가 들어 있었다. 한달 쯤이나 되었을까, PC를 켜고 듣고 있을때, 손자녀석이 뭐예요하면서 눈길을 주더니 어느새 퇴근하면 할아버지 비지스 틀어주세요하며 모니터 앞에 앉는다. 며칠을 지나면서 곡을 익혀 흥얼거리듯 따라 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더듬거리며 가사 흉내도 내고 있다.

아내는 당신 손자를 어쩔려고 그래요 하지만, 어느새 아직 두 돌도 되지 않은 작은 손녀 녀석도 의자를 갖다 달라고 하고는 곁에서 박수치고 박자 맞추기도 하며 함께 보게 되었다.

모니터를 함께 보면서. 비지스란 깁이란 삼형제가 만들었는데 오른쪽이 큰형이고 가운데, 왼쪽이 쌍둥이 동생들인데 막내는 몸이 아파 병원에서 수술을 하다가 죽었단다 하고 일러주었더니, DVD를 켤 적마다

 이 사람이 형이지요하면서 복습을 한다.

 

찌르릉 찌르릉동요를 불러야 하는 수준의 어린애들이 팝송을 듣는 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팝송을 자연스럽게 듣게 된다는 건 작곡이 워낙 잘 되어 있기 때문인지, 음악에 소질이 있기 때문인지를 판단해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화면을 보면서 음악을 동시에 들을 수 있기에 아무래도 쉽게 곡을 익힐 수 있게 되는게 아닌가 상상을 해 보지만, 비틀즈 곡은 CD로만 들어서 익힌 셈이니 화면 때문인 것은 아니다. 워낙 세계를 주름잡던 그룹이니 나름대로 이유야 충분히 있을테고,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들이었기에  세대를 아우르는 수많은 명곡을 우리에게 선사해 준 것임을 실감하게 한다.

어린 나이에 팝송을 듣는다는 것이 커가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짐작 할 수도 없고, 좋은 음악이란 어쨌든 인류를 행복하게 해주는 훌륭한 도구였으니 악영향은 미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음악이 없는 내 생활을 상상할 수 없듯이 그 녀석들도 삶의 윤활유, 활력소가 될 수 있도록 어떤 음악이든 가까이 하면서 바른길을 나아 갈 수만 있다면 하고 기대해 본다.

2012. 4. 25. 13:56

어론리에서 새봄 맞기

지난 주말 봄비가 내리는 어론리에는 새봄의 느낌이 가득하였다. 개나리, 진달래와 더불어 묘목을 심어

4년을 기다렸던 매실이 드디어 꽃을 피웠고, 옆 개울엔 도롱뇽 알 꾸러미가 부화를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에 다시 심어둔 백합, 튤립, 수선화, 무스카리가 쑥쑥 솟아 오르며 꽃을 피울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번에 심은 호도나무, 이팝나무, 밤나무 묘목은 아직 숨 고르기 준비 중인지 잎이 돋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자산홍은 꽃송이를 가지마다 달고 있고 작약은 새순이 많이 올라 왔다 

 

동네 어르신들은 올해는 윤달이 들어있어서 날씨가 풀리지 않고 있다고 하셨지만, 반갑게도 무당개구리 몇마리가 어느새 집 주변에 눈에 띄기 시작했다. 성미 급한 나비는 벌써 날기 시작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듯하고, 나방이도 불빛을 찾아 하나 둘 모이고 있다. 모르는 사이에 봄이 이렇게 시작한

것이다.   

2년 전에 집안으로 날아 들어와 우리를 당황하게 했던 곤줄박이는 새집에 자리를 잡아 새끼 칠 준비가

한창이다. 부엌 환기구에 자리를 잡아 알을 낳았다가 달아나버린 그 녀석들인지 모르지만, 두 쌍이

재빨리 드나드는 새집이 우리를 궁금하게 한다. 아내는 사다리를 놓고 들여다 보고 싶다고 했지만 행여

달아나버릴까 망설여 진다.

일요일 저녁 무렵, 비가 그치려나 하니 곤줄박이 녀석이 느티나무에 나타나 사방을 둘러보며 짖어대었다. 아직도 우리를 이웃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사람과 가까이 하며 손에 잡고 있는 먹이를 먹고 있는 사진도 있던데

얘들아 우릴 두려워하며 거리들 두는건 좋단다. 올해는 알 돌보기 잘해서 새끼잘 키우고, 내년에도

찾아오렴.

2012. 4. 12. 11:46

자연과 더불어 살기

언제부터인지 내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새나 나비, 풀 벌레들이 소중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홍천 집은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조금 떨어져있기 때문일까 집안에서 온갖 벌레를 만날 수 있다. 혹시나 물리면 어쩌나, 병원균을 옮기는 녀석이면 어쩌나 불안하지만, 집 주변에 수없이 눈에 띄는 벌레를 보면서 농약을 멀리 하며 벌레와 나누어 먹는 농사짓기를 한 효과라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벌레는 여러 가지이다. 개미부터 시작해서 여름 밤에는 불빛을 보고 모여드는 나방이 같은 야행성 곤충, 풍뎅이, 노래기 비슷한 놈, 하루살이, 날도래 같은 수서곤충의 성충, 잽싸기 이를데 없는 그리마 등등, 파리채로 두드려 잡았던 적도 있었지만, 얘들아 이제 집안으로는 들어오지 마라 하며 산채로 내쫓으려 하고 있다. 홍천 집터도 사실은 그 녀석들이 원래 주인이었기에 함부로 대하기가 망설여지기 때문이기도 한다.

 

양배추를 심어보니 겉의 이파리는 벌레가 파먹어 엉망이 되더라도 속까지는 벌레가 파고들지 않으니 벌레와 나누어 먹어도 됨을 알게 되었고, 옥수수 역시 벌레가 파먹어 들어가 자리를 잡기도 하지만 내다 팔 목적으로 상품성을 목표로 하지 않으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살림처럼 유기농 제품을 팔고 있는 가게에서는 벌레 먹은 흔적이 분명한 채소가 자리를 잡고 있고, 더구나 비싸게 팔리기도 하니 어느새 건강한 식품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조금 흠집이 났거나 모양새가 빈약하더라도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멀리하려고 애써서 기른 결과물이고, 그런 먹거리가 건강에 도움이 될꺼라는 인식이 확대된다면 농사를 짓는 사람이나 소비자나 모두 건강한 환경에서 살수 있게 되는데, 조금씩 양보하며 개선된 내일을 기대하는 공감대가 퍼져나가는 방법은 없을까?

 

최재천 교수는 EBS 특강에서 자연계에서 경쟁이 아닌 공존, 공생하는 사례를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학교 교육에서부터, 신문이나 TV방송에서, 인간이 자연과 공존해야 하는 이유를 비롯하여 환경을 보존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꾸준히 알려주고 이끌어야 한다.

어느새 아파트 주변에는 개나리가 피고, 나무 가지는 조금씩 빛깔이 바뀌어 봄이 다가왔음을 느끼게 해고 있지만, 올해는 밭 농사를 어떤 수준으로 절충해 가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EM용액을 잘못 써서 그랬는지 대추는 할 알도 달리지 않았고, 콩은 두 주먹 밖에 거두지 못했다. 혹시나 주변에서 모두 농약을 쓰지 않는다면 해충의 피해는 내 텃밭에 집중되지 않으면서 해충의 밀도가 낮아질테고, 찾아오는 새가 늘어나면 해충도 줄어들게 되리라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밭의 비닐을 걷어내고 마른 잡초 줄기를 꺾어 버리며 집 주변을 정리하면서 보니 지난해 보다 사마귀 알을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우리 밭에 모여 살아라 예들아 올해도 너희만 믿는다 하며 행여 밟히거나 손을 타지 않도록 조심스레 자리만 조금씩 옮겨주었다.

2012. 4. 9. 17:33

곤줄박이 보금자리 마련해 주기

봄이 온 것일까 얼마 전부터 집 주변에 곤줄박이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지난해에 만들었던 새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씬하지 않던 녀석들이 둥지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일까 망설이듯 눈치를 보더니 드디어 묵은 집에 드나들며 이끼를 물어 나르며 자리를 잡는 것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 가보니 집안에서 보금자리를 다듬는지 계속해서 나무 판자를 쪼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둥지를 마련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녀석들은 앞 마당의 느티나무주변을 맴돌고 있기에 부지런히 서둘러 작은 크기로 한 채를 더 지어서 느티나무 위에 걸어주었더니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마 집을 지으며 모아 두었던 묵은 자투리 나무이기에 페인트나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우리가 조금씩 주변과 가까이 하려 했던 걸 알아주게 된게 아닐까 반갑고, 다행스러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에는 텃밭을 갈아 엎을 준비를 한다고 퇴비를 뿌리며 느티나무 주변을 가까이 하게 되니 침입자라고 오해를 했을까 언제 날아 왔는지 한 녀석이 연상 시끄럽게 재재거렸다. 일 주일 만에 나타난 무상 주택 제공자가 오히려 그 녀석 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다니

아내는 곤줄박이를 보더니 원래 우리 집 자리도 그 녀석들이 원주민이었으니 당연한게 아니냐고 한다.     

옆 개울에는 지난해 때아닌 이른봄 폭우로 도롱뇽 알이 모두 휩쓸려 내려가 버려 이제 더 이상 못 보게 될까 해서 섭섭했는데, 올해도 여러 무더기가 눈에 띄었다. 폭우가 남긴 상처가 어느새 회복이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증거물을 보고 아내는 아주 반가워 했다.

 

올 봄엔 새집을 드나드는 곤줄박이 두쌍, 개울엔 도롱뇽 올챙이 가족이 번식하는 모습을 훔쳐보며 지내는 즐거운 주말이 더욱 기대 되게 되었다     

 

2012. 2. 24. 13:28

EBS의 최재천 교수의 특강, 다윈의 진화론을 보고…

지난 설 연휴, 밤마다 EBS에서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의 진화론 특강을 몇 편 보았다. 특히 나가수란 방송 프로그램과 자연계의 생존 법칙을 견주어 설명하는 걸 보며 주어진 환경에 웬만큼만 적응하며 맨 뒤로 쳐지지만 않으면 사실 생존에는 문제가 없음을 왜 모르고 살았을까 뭔가에 크게 속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왜 최고를 달성하라고 추켜세우고, 금메달 만을 인정하면서 살아왔을까? 우리가 지금껏 뭔가에 홀렸던가 아니면 속아서 살아왔던가를 돌아보았다. 겉으로는 잘했어 잘했어 하면서 속으로는 일등이 아니면, 금메달이 아니면 꽝이지 해 왔던게 아니냐는 반성을 하게 된다. 남극의 눈물이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펭귄이 극한의 기후 남극에서 꾸려가는 삶을 보니 수 많은 새끼들 중에서 천적에게 희생을 당하는 녀석들은 아주 체력이 뒤떨어지던가, 운이 나쁘던가 하는 일부분일 뿐, 대다수는 멀쩡하게 살아서 어미로 성장하는 걸 보며, 나는 내 자식들한테 어떻게 요구를 하며 살아왔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기업에서는 오로지 최고가 아니면 세상에서 도태되고 만다, 21세기에는 몇%의 인물이 이 세상을 끌어갈꺼다 식의 최고 지향주의로 직원들을 세뇌시키고 있다. 나 역시 그런 교육을 수없이 받고, 현혹되어 그렇게 믿고 지금껏 후배들을 선동하듯 밀어붙이며 살았다.
연휴에 며칠 동안을 손주 녀석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대체 그 녀석들이 살아갈 세상은 어떻게 전개가 될 것인가? 직업에 대한 가치관은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튈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의 앞서가는 능력을 조금 처진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보다 조금 부족한 이들을 도와 주면서 함께 공존해 가는 여유와 지혜를 가진 인물로 성장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만 있다면 정말 다행이겠다.

부와 권력을 차지해서 성공한 인물로 인정을 받기 보다는 바르게 살면서 자신의 능력을 나누며, 함께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인물로 키워보려는 부모로 가득 채워지는 세상을 꿈 꾸어본다
.  


2012. 1. 12. 11:51

"목수 김씨의 나무 작업실"을 읽고

지난해 가을 갑자기 내린 폭우로 어론 리에도 골짜기가 무너져내려 피해를 입은 곳이 많이 눈에 띄었다. 집 주변의 골짜기도 많이 쓸려내려 갔다. 이웃 어른께서는 이런 비는 여기 살면서 처음이다, 이렇게 비가 퍼붓듯 많이 오는 걸 본적이 없었다 하시며 기후가 바뀌고 있음을 걱정을 하셨다.  봄에 날씨가 풀리면 집 옆 골짜기를 어떻게든 보수를 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는데, “목수 김씨의 나무 작업실을 읽으며, 홍천 집을 지으면서 나는 자연을 얼마나 훼손시킬 것인가를 고심했던 때를 되돌아 보았다  
목수일을 하면서도 늘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생각하는 작가의 글에 공감하며 여기에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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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
天災)는 없다.

 

수년 전 끔찍한 물난리를 겪었던 까닭인지 비가 그치지 않은 며칠 내내 가슴을 졸여야 했다. 수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남의 일 같지 않다. 집이 무너지고 다리가 떠내려가고 길이 끊겼으며 사람들은 흙더미에 파묻히고 물에 휩쓸렸다. “전쟁을 치은 듯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 엄청난 재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인간들은 자연 앞에 초라해지는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모두들 천재지변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니다. 처음부터 천재는 없었다. 자연은 늘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자연은 늘 그렇듯 번개를 내리고 비를 뿌리고 그 물이 넘쳐흘렀을 뿐이다. 하늘의 재앙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이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물길을 돌려세워 둑을 쌓고 산허리를 잘라내 길을 만들고 나무를 베어내 밭을 만들고 불이 넘쳐야 할 곳에 흙을 메워 집을 지었던 것은 사람들이다.

인간은 자연을 밀쳐내고 도시를 세웠고 도시는 승리에 도취된 기념비로 가득하다. 인간의 문명이 자연과 벌이는 한판 전쟁이었음은 틀림없지만 때로 무모한 싸움일 때가 더 많다. 가끔 자연은 사람들이 잊고 있던 그 사실을 상기 시켜 줄 뿐이다. 자연의 자리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선 인간들이 새삼스레 천재지변을 말한다.

그렇더라도 천재지변으로 고통을 떠안는 것은 늘 없는 사람들의 몫이다. 자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게 들이닥친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높고 튼튼한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천재가 빈번한 까닭은 자연조차 골고루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에너지를 펑펑 쓰면서 온난화 문제에 인색한 나라들은 잦은 재해가 빈곤한 나라에 들이닥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산을 헐어 골프장을 만들고 산허리에 별장과 펜션을 짓고 강을 돌려세워 다리를 놓고 멀쩡한 나무를 베어내고 산을 파헤쳐 단지와 상가를 만들어 본 사람들은 산사태가 날 집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개발과 발전의 이익을 도시의 기념비에 쏟아 부을 때, 그저 자연이 허락하는 작은 공간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만이 고스란히 자연을 감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의 고통은 자연을 헐어 얻은 부의 행복 건너편에 있다.

어차피 자연과 한판 경쟁을 벌이자고 나선 사람들이라면 그 싸움이 전면전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누군가가 감내해야 할 몫이 아니라 모두의 문제이다. 자연이 제 갈 길을 가겠다고 들이닥칠 때 마다 천재지변으로 말한다면 그보다 무책임한 것이 없다. 쓸려 내려간 길 앞에서 시공업자와 공무원들은 얼굴을 붉히며 피치 못할 천재지변이었음을 먼저 말한다. 그들만의 탓이겠는가? 언론은 앞다투어 천재지변을 내세우며 인간의 온정을 호소한다. 자연의 책임을 물으며 이웃의 정을 나누는 것으로 고통은 해결되지 않는다.

천재지변은 자연의 탓이 아니라 천재지변을 말하는 인간의 탓이다.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파헤친 자연의 피해를 늘 없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야만의 문명일 뿐이다. 엊그제 내린 폭우는 그걸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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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0. 11:44

우연 또는 필연-3

몇 주일 전 홍천에서 귀경하는 길,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앞 타이어의 우측에 펑크가나서 타이어가 거의 주저앉아버린 것을 집에 도착해서야 알게 된 것이다. 몇 달전에도 타이어에 박힌 나사못 때문에 놀란 적이 있었는데 꼭 같은 상황을 다시 만난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앞 타이어의 펑크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인데, 아내가 만났던 정비업체의 직원은 이런 타이어로 어떻게 고속도로를 달렸냐고 하면서, 큰 사고 날 뻔했다며 오히려 더 놀랐단다. 거의 주저앉은 타이어로 100 여 킬로 미터를 달린데다가 타이어를 자세히 살펴보니 옆이 칼로 벤 듯이 날카롭게 찢겨져 있었으니 정말 위험한 위기를 넘긴 것이었다.

타이어 교체로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이른 아침 멋모르고 홍천을 떠나 두 시간 가까이 사고 일보 직전임을 모르고 즐겁게 운전을 했다는 걸 돌아보니 한심하기도 하고, 아직은 세상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을지, 운 좋게도 타이어가 견디어 준 결과였을지를 전혀 모르고 있으니, 사람이란 참 어리석은 존재임을 실감했다.


얼마 전 작은 녀석 부부와 다녀온 시애틀 부근의 Mt. Rainer, Olympic N.P., Mt. Hellens 여행길에서는 변화무쌍하는 날씨에도 원하던 경치를 대부분 기적처럼 볼 수 있었다. 아침에 퍼붓던 빗줄기가 굵어졌다가 가늘어지며 잠시 하이킹을 즐길 수도 있었고, 산 정상에 이르러서는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히는 덕분에 환상처럼 펼쳐지는 경치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날씨가 바뀌고, 정상에서 내려오며 폭우를 만나기도 하는 스릴 만점의 결과를 여러 차례 겪고 나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시간이 지체되지 않았더라면, 길가의 경치를 즐기려 잠시 지체하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지, 과연 우연히 그런 상황이 이어지게 된 것인지, 누군가가 결정해 놓았던 의도에 이끌리게 된 결과였을지 궁금하게 하였다.


장자가 나비꿈을 꾼 이야기가 생각이 나기도 하는데, 요즘엔 살면서 부딪히게 되는 상황 하나하나가 누군가에 이미 정해진 각본을 따르고 있는 것인지, 내가 스스로 정하는 일정에 따라 가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인지 점점 더 알 수 없음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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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며 열고 있는 세상은 과연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저 매사에 순응하며 사는 것만이 지혜로운 결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