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9. 6. 17:19

참된 시인이란... (윤구병 님)

변산 가는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낡은 말과 글의 굳어져버린 껍질을 깨고, 말과 글, 그리고 거기에 비친 생각과 느낌의 새로운 결을 드러내고, 그 생각과 느낌을 뒷받침하는 삶의 새순을 키워내는 사람이다. 죽어버린 말과 글의 질서에 매달려 예쁜 시어로 꾸미기나 하는 사람은 참 시인이 아니다. 참 시인은, 비유하자면 운수 행각을 하는 떠돌이 중이나 제대로 농사짓는 농부와 같은 사람이다. 운수 행각을 하는 중들은 이틀 밤을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벌써 하룻밤을 지나면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낯익은 것으로 바뀌어 있고, 그렇게 되면 주변 사물에 관심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늘 낯선 것 사이에서 온몸과 마음을 활줄처럼 팽팽하게 긴장시켜 주위의 모든 것에 주의 깊은 관섭을 기울여 접촉하는 자세, 새롭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늘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렇게 해서 온몸과 가슴이 새로움으로 가득차게 함. 이것이 길 걷는 사람의 마음 가짐이고 시인의 눈이다.
삶은 늘 새로운 것이다. 낯익은 것, 편안한 것, 익숙한 것이 생겨난다는 것은 머문다는 것,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느슨해진다는 것, 타성에 젖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죽음에 길든다는 것이다. 어린애의 눈은 늘 호기심에 차 있다. 살아 있다. 이 눈을 가져야 시인이 될 수 있다. 늘 새로운 느낌, 새로운 눈으로 세상과 만나는 사람이 시인이다. 참 농사꾼도 마찬가지다. 진짜중도 마찬가지고…. 시가 마침내 다닫는 궁극지점은 깨우침의 순간 중들이 읊는 오도송(悟道頌 깨우침의 노래)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깨우침의 노래는 낡은 말과 글의 질서 속에서 말뜻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나 사고나 느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된 표현으로 가득 차있다. 삶의 흐름이란 그런 것이다. 순간순간 비약이고 창조다. 이미 만들어진 어떤 그물로도 그 살아 뛰는 고기는 건져올릴 수 없다. 사랑이 삶의 궁극 표현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세상은 사랑이 없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세상과 딴판이기 때문이다. 낯설게 만들기, 낯선 세상 속에서 낯선 나그네로 살아가기, 끊임없이 사랑 속에서 일을 놀이로 만들기, 그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와 고통을 온 가슴으로 끌어안기.
버스에서 내려 걸어오면서 춤을 추었다. 춤추는 내 그림자를 보면서 내가 참 춤을 잘 추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춤의 최고 경지가 원효가 추었다는 무애춤이다. 달빛과도 놀고, 가로등 불빛과도 놀고, 겨드랑이로 스미는 초가을 산들바람에도 어깨가 들리고 개구리와 풀벌레 울음에도 발걸음이 그때마다 달리 건들거리고….
아이들에게 식물도감이나 약초도감에 나오는 풀이나 나무 이름을 일러주어 무엇하리. 예쁜 풀, 마음에 드는 나무를 보면 냄새도 맡아보고 맛도 보고 올라가보기도 하고 꺾어보기도 하면서 스스로 이름을 짓게 만들고 나중에 그 나무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는지도 가르쳐주어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풀이나 나무 이름이 마음에 안 들거든 새로 지은 예쁜 이름으로 그 풀과 나무를 부르도록 하자. 새 이름을 붙이고 새 이웃을 만들고 그 새로운 관계의 그물을 새로 떠서 살아 생동하는 생명의 고기를 건져올리게 하자. 죽은 세상을 산세상으로 바꾸는 길이 그 길이 아니랴. 96년 8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