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이란??

어릴적을 되돌아보면 비교적 잘 사는 집의 안방이나 대청마루에 조그만 가족사진들을 닥지닥지 끼워 놓은 액자가 걸려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액자 하나에 수많은 이야기까지 담아 걸어두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예전에는 흑백사진도 그나마 여유가 있는 집에서나 걸어둘 수 있었지만, 요즘엔 색다른 맛을 느껴보려는 목적으로 흑백으로 결혼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칼라 사진이 보편화 되고, 디지털 카메라가 흔해진 지금,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진학과 학생이나, 기본기를 충실히 닦아 보려는 일부 아마추어 이외에는 흑백사진 만들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드물다.

흑백사진이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것이 몇 가지 있다. 즉 ‘흑백 사진용 필름은 칼라용 보다 비싸다, 사진을 만드는데 돈도 더 든다.’는 것과 흑백사진은 소위 말하는 작품사진 작가나 찍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어쩌다 그렇게 인식되게 되었을까?
칼라 사진이 대중화된 이후로는 –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 두산 현상소 같은 전문업체에 따로 주문을 해야 인화를 해 주었으니 그런 관념이 생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흑백 사진용 필름을 사려면 종로나 충무로를 가야 구할 수 있게 되었고, 그나마 몇 년 후면 구하기 힘들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흑백사진을 보는 시각에 대해 몇몇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의견은 ‘흑백사진은 어쩐지 좋아요’ 이다. 흑백사진을 가까이 하지 못했던 세대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 해 보았다.

- 무채색은 우리에게 싫증을 느끼지 않게 해준다.
- 무채색이지만 상상 속에서 색깔을 채워볼 수 있다.
- 무채색이기에 본래의 색깔에 비해 과장이 되거나 부족하게 인화가 되어 찍을 때의 느낌을 100% 완벽하게 표현해 주지 못하는 칼라 사진보다 오히려 보는 이가 기대를 반쯤 접고 사진을 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예전 단독주택에 살던 시절에는 흑백인화 장비를 벼룩신문을 통해 우연히 갖추게 되어 틈틈이 만들어 볼 수 있었는데, 아파트로 옮긴 이후엔 아예 손을 놓고 말았다. 관련서적도 읽고, 귀동냥으로 주먹구구 식이기는 하지만 사진 만들기를 시작했는데, 빨강색 암등 아래에서 백색 인화지가 요술처럼 명암을 띄며 사진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처음 만들어본 흑백사진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인화한 흑백 사진은 회사에서 업무상 만났던 외국 엔지니어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용도로 많이 활용도 했었는데… 벌써 손을 뗀지 어느새 4년이 흘러버렸다.
KBS 방송국에서 벌였던 남북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서 최근의 남북 가족 상봉에 이르기 까지 꾸준히 카메라에 비추어 지는 것은 누렇게 색이 바래고 귀퉁이가 죄다 닳아버린 흑백 사진들이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사진이지만 그 조그만 한 장의 사진에 담긴 가족들의 한 많은 사연은 몇 권의 소설책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소중한 것이리라. 사진 한 장에 가족의 기나긴 역사가 묻혀 있는 것이다. 그 어떤 다른 물체에 그만한 이야기를 담아 둘 수 있을까?

이미 고인이 되신 우리나라 산 사진의 대가 김근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 난다. 건강하고 의욕이 왕성할 때는 필름을 구할 길이 없어서 사진을 못 찍어 안타까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나중에 필름이 흔해지니 건강이 따라주지 못해 산을 오르지 못해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벌써 몇 해 전에 선생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사진이 남아 있기에 아직 그분의 목소리도 생생하게 기억 나게 해 주고있다. 흑백 사진의 생명은 무한하다. 적어도 내가 세상에 남아있을 동안에는 그럴 것이다. 김 근원 선생님이나 안셀 아담스처럼 산과 자연을 흑백에 모두 담아내는 분들이 앞에서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나도 사진에 빠져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채색으로 표현하기에 수묵화도 흑백 사진과 같은 느낌을 준다.

오주석 교수는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이란 책에 ‘수묵화는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가능케 한다. 수묵화는 회화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양식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명상을 낳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들은 회색이 생리학적으로 시각 속에서 완전한 평형 상태를 낳는다고 말한다… 무채색은 온갖 색이 바래져서 화려함을 잃은 마지막 모습이다. 그런데 옛부터 ‘먹에는 온갖 색이 들어 있다.墨有五彩’ 는 말이 또한 전한다. 이것은 무채색이 모든 색의 소멸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모든 유채색이 이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근원이기도 하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수묵화는 점잖아서 보는 이를 자극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감상자가 평정한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그림 속의 세계로 스스로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 수묵화의 감상은 감각되는 형상에 수동적으로 지배되고 압도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보는 이가 사전에 풍부한 시각 경험을 쌓고 또 다양한 인생의 체험을 겪은 후에, 그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은근하게 작품이 암시하는 격조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흑백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게 해 주기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흑백사진을 찾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