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호시노 미치오씨의 노던라이츠를 감명 깊게 읽었다. 야생사진 전문가로서 순수한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알래스카를 아끼던 인물이었기에 관심을 갖고 읽게 된 ‘바람 같은 이야기’, ‘여행하는 나무’에 이어 세 번째 책이다.
작가가 알래스카 인디언의 생활을 가까이 했기에, 그들의 생각에 공감을 했기에 남다른 시각으로 자연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글을 보면 알래스카의 자연에 묻혀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디언의 삶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캄차카 반도 취재 중 곰의 습격을 받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안타깝기도 하고, 더 이상 글을 남길 수 없게 되었기에, 누구보다도 알래스카의 자연을 사랑했던 그의 간절했던 마음이 더욱 소중히 느껴진다.
북극의 동물들, Animals of the North의 저자 빌 프루이트가 동일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정확히 1년 뒤였다. 이 책은 생물학 저서라기보다는 알래스카의 자연을 묘사한 거대한 서사시라고 표현하는 게 옳다.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이기에 나는 지금도 보물 1호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대목은 제 1장 ‘여행하는 나무’다. ‘여행하는 나무’의 주인공은 알래스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등피나무다. 이른 봄의 어느 날, 잣새 한 마리가 등피나무에 앉아 씨앗을 쪼아 먹는다. 낭비가로 유명한 이 새는 그날도 어김없이 씨앗들을 흘린다. 잣새가 떨어뜨린 씨앗 중 하나가 바람에 날려 우연히 페어뱅크스를 관통하는 체나 강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이름 모를 숲에 다다른다. 씨앗은 이 숲에 뿌리를 내리고, 세월이 흘러 거대한 성목으로 자라난다. 또다시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고, 매일 조금씩 강변을 침식하던 물살이 마침내 등피나무 뿌리를 적신다. 그렇게 또 겨울이 찾아오고, 봄이 되어 산의 눈이 녹고, 불어난 강물이 등피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린다. 등피나무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강물에 몸을 싣는다. 체나 강, 타나나 강, 유콘 강을 여행하던 등피나무는 베링 해까지 밀려간다. 북극 해류는 알래스카 내륙의 이름 모를 숲에서 태어난 등피나무를 북쪽 툰드라 지대의 해안에 내려놓는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툰드라 해변에서 등피나무는 그곳의 랜드마크가 된다. 우연히 등피나무를 발견한 여우가 해변에 올 때마다 등피나무 줄기에 영역을 표시하고 돌아갔다. 어느 겨울날 여우 발자국을 따라온 에스키모가 등피나무에 올가미를 친다….. 등피나무의 여행은 툰드라 벌판에 외로이 서있는 작은 오두막집의 난로에서 불태워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것이 여행의 끝은 아니었다. 재가 되어 대기로 날아간 등피나무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이 책에 흐르고 있는 극북의 신비로운 정취는 내 가슴속에서 알래스카에 대한 동경으로 거듭났다.
작가 본인도 한 그루의 등피나무가 되어 시간의 여행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그 여행을 마치고 말았다.
작가가 빌 프루이트의 글에 공감을 했던 이유가 내가 세상살이 인연에 대해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생각과 같은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의 삶도 등피나무의 여행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세상에 태어나 알게 모르게 고리처럼 연결된 인연을 따라 성장하여 배필을 만나 자식도 낳고,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며 살다가 세상을 뜨게 되면 다시 자식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그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꼭 같다.
몇 년전 미국 여행 중 제가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깜짝 놀랐던 그 덩치 큰 시커먼 무스(Moose)를 혹시 작가가 오래 전에 알래스카에서 카메라에 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스쳐갑니다.
작가는 ‘여행하는 나무’ 의 맨 마지막에 남긴 글, ‘물망초…. 알라스카에서 보낸시간’ 을 보니 우리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라는 숙제를 남겨두었다.
결과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는 단어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결과에 상관없이 지나온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진정 의미를 갖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렇게 쌓인 시간들이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생일 것이다.
볼을 스치는 북극 바람의 감촉, 여름철 툰드라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 백야의 엷은 빛, 못 보고 지나칠 뻔한 작은 물망초….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에 마음을 조금 얹어서 오감의 기억 속에 남기고 싶다. 아무것도 낳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누리고 싶다. 경황 없는 세상의 삶과 평행을 이루며 또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마음 어디에선가 항상 느끼면서 살고 싶다. 그 소중한 시간들을 언젠가 내 아이에게도 전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