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서 소근소근/비처럼 음악처럼'에 해당되는 글 121건
- 2011.05.16 튤립과 함께 찾아온 봄
- 2011.02.15 권정생 선생님의 "애국자가 없는 세상" 1
- 2010.12.14 소나무를 벌목하며
- 2010.12.01 유치원가는 손자 녀석을 보며
- 2010.12.01 텃밭을 정리하며
- 2010.09.01 금년 옥수수 농사를 마무리하며
- 2010.04.21 어론리의 새봄맞이
- 2010.04.20 다시 돌아온 곤줄박이
- 2010.04.05 묘목을 심으며
- 2009.11.13 노던라이츠를 읽고
지난해 봄에 시기를 맞추지 못해 제대로 볼 수 없었기에 반신반의하며 거두어 두었다가 가을에 다시 마당에 심어준 녀석들이 지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쫑긋 쫑긋 솟아나며 봄을 열어 주었다. 이웃에서 얻어온 짚을 덮어주며 겨울나기에 도움이 될까 하고 기대를 했었는데, 거짓말처럼 화사한 자태를 뽐내며 봄소식을 전해 준 것이다.
아직 어론리에서 튤립을 본 적이 없기에 혹시나 했는데, 땅속에서 숨죽이고 겨울을 난 녀석들이 소리없이 솟아오르고, 일주일 사이에 수선화가 네 송이, 배꽃이 탐스럽게 피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야 말로 생명의 신비를 실감하게 해준 하늘의 선물이다.
올 봄에는 유난히 꽃다지, 냉이가 집 주변에 많이 피어 장식을 해 주었지만, 내가 직접 가꾸며 돌보는 생명체가 겨울을 견디고, 봄소식을 전한다니 기쁘고, 반갑기 이를 데가 없다. 어느새 뒷 골짜기의 귀룽나무, 조팝나무 흰 꽃이 올해도 어김없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웃 손선생 댁에서 얻어와 심었던 금낭화가 빨간 복주머니를 줄줄이 달고 봄바람을 즐기고 있고, 산 괴불 주머니는 노랑 꽃을 자랑하기 시작한지 오래 되었다.
얼마 전 때아닌 시기에 퍼부은 폭우로 도롱뇽 알주머니가 몽땅 떠내려간 탓일까 골짜기에 올챙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겨울이 너무 춥네 어쩌네 툴툴대며 지내지만, 주변의 다른 생명체는 주어진 자연 조건에 순응하며 너그럽게 세상을 살아간다. 몇해전 가을 포클레인으로 파헤쳐서 훼손된 골짜기에서 사라졌던 괭이눈 몇 포기가 눈에 띄는 걸 보며 사람이 손대지 않아도 자연 스스로 회복이 될 수 있음을 실감했다.
미국에서는 국립공원에 산불이 나거나 해충 피해를 입어나 해도 인위적으로 손을 대지 않고 그냥 놓아둔다고 한다. 스스로 회복이 되도록 기다려 준다는 여유로움, 도움을 주려다가 오히려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이미 느꼈음이 아닐까 한다.
지난해 봄에 심었던 소나무 묘목 때문에 마음 고생이 많았다. 겨우 자리를 잡고 겨울을 넘긴 녀석들 중에서 일부는 병이 들은 탓인지 잎이 누렇게 마르고 있는 것이 보이지만, 농약을 뿌리느니 그냥 두기로 했다. 도태되기도 하고, 스스로 회복이 되기도 하는 자연의 능력을 믿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 한달 정도가 지금 내린 결정의 잘잘못을 가려줄 것이다.
우연히 권정생 선생님의 시 “애국자가 없는 세상”을 읽었다.
아니 이건 비틀즈의 “Imagine” 아냐?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라가 없어져 국경이 사라지고 세계가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되는 세상, 그토록 애타게 바라며 꿈꾸던 세상을 저 세상에서 만나셨을까? 선생님께서는 비틀즈의 노래를 가까이하지 않으셨으려니 하고 상상이 되는데, 전혀 다른 세상을 살면서 같은 생각을 하셨으니 이것 역시 우연일까 필연일까?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이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 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하늘이 잔뜩 흐려 우울하게 하던 이 주일 전 일요일 아침 구거 가까이에 있던 소나무 세 그루를 베었다.
지난 가을의 태풍에 주변 산의 나무가 제법 많이 쓰러졌는데, 집 주변의 나무를 유심히 살펴보던 아내의 눈길에 문제의 소나무가 위험스럽게 여겨져 결국 수소문 끝에 산 주인의 승인을 얻어 정리를 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신사 수리용 나무를 벌목하며 제를 지내는 사진을 책에서 보았는데, 어제의 벌목작업에는 그저 막걸리 몇 잔으로 소나무를 이 세상에서 보내는 의식을 대신했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소나무를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어 위험하다는 우리만의 편리한 이유만으로 무작정 베어내자니 아내도 몹시 마음 아파했다.
우리는 집터를 마련하여 지난해에 집을 지으며 자리를 잡게 된 굴러온 돌이지만 소나무는 오래 전부터 산자락에 자리를 잡아 살아왔으니 박혀도 단단히 박혀있던 돌인 셈이다. 막걸리를 나무 주위에 뿌리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집을 지으면서 되도록이면 주변환경을 해치지 않도록 하자고 생각을 많이 했지만, 결국엔 15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소나무를 세 그루나 베어내게 되었으니 그간의 고민이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나무 베는 작업을 지켜보던 동네 어르신들은 위험해 보이는데, 정리를 잘한 거라고 쉽게 말씀을 하셨지만, 짧은 기간이었지만 곁에서 이웃으로 지내던 나무를 그루터기까지 잘라내 버리니 마냥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 이를 데 없다.
제일 굵은 나무 밑동의 나이테를 세어보니 50살을 조금 넘은 듯하니 결국 동갑내기 동료를 밀쳐낸 꼴이 되었고, 골짜기에 드리웠던 여유로운 그림자는 소나무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지난 일요일에 주변을 정리하며 보니, 휑하니 소나무가 자리 잡았던 터에는 영하의 찬바람만이 스치고 있었다.
세상사는 잃는 것과 얻는 것이 늘 공존하는 법, 잃은 것이 얼마나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소나무 그늘에 가려 눈치 보듯 살고 있던 뽕나무는 오히려 돌연 양지로 드러나게 되었다. 소나무를 베어낸 아쉬움을 내년에 어린 손자 녀석과 즐겁게 오디를 따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며 위로를 해 주고 있으니, 나 역시 쉽게 결정하고 편하게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반성할 줄 모르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도 나름대로 골짜기를 지켜가며 존재해온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오랜 세월 유지해온 질서를 인간으로 잠시 실권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또 한번 파괴한 꼴이 되었으니, 그저 우주 속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란 이렇게 제 위주로만 쉽게 생각하는 어리석은 존재일 뿐이다.
녀석이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세 돐이 다가오고 있고, 유치원에 등록을 하고 세파에 시달리기에 첫발을 내디뎠다.
며칠전 TV에서 유치원에 선착순 등록을 하려고 밤샘을 하는 해프닝을 보았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내 자식만은 일류로 키우겠다는 욕심이 이불 뒤집어쓰고 밤새우기를 감수하는 멋진(?) 부모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남 지역의 부유한 부모들은 자식 교육을 일류 유치원에서 시작하며 인맥관리를 한다고 들었다고 한다. 영어 유치원을 보낸다고 월급 털어 투자(?)하고, 어찌되려는 세상일까?
나는 우리 아이들이 정직하고, 올바른 생각을 지니고, 어느 정도의 수준 이상으로 성장하기만을 바라며 지켜보았는데, 지금껏 한번도 후회 해 본적이 없으니, 만일 30년 전으로 되돌아가 다시 아이들을 키우게 되더라도 크게 내 생각이 바뀔 것은 없을 것 같다.
수능시험을 치를 무렵이 되면 자식이 시험을 잘 보게 해주는 용하다는 무엇을 찾아 다니기도 하고 100일 기도를 드리네 어쩌네 치성을 드리는 모습을 TV에 보여 준다.
자식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누가 뭐라 해도 일류 대학을 나오면 최소한의 수준은 보장이 된다는 기대감으로, 남 보다는 편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첫 단추라고 여기기에, 입시 지옥이란 영원히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EBS TV에서는 세계의 교육현장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바람직한 교육환경은 이렇다, 저렇다 하고 소개를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아득한 거리감이 있으니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다.
기약 없는 물질적인 풍요만을 기대하며 학교 생활을 모두 입시지옥을 벗어나기 위한 고통의 과정으로 몰아 넣는 지금의 교육환경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 채로 지속될 것임은 분명하다. 손자 녀석 역시 그런 환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고통을 나누며 위로해 주어야 할 책임이 아무런 대안이 없는 내게 주어졌다.
희망 없는 교육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부모들은 대안학교로 자식들을 보내 지옥행 코스를 우회하려 하고 있지만, 그 역시 현실성을 생각해 보면 아직은 해답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치원은 친구들을 사귀며 사이 좋게 놀러 가는 기대되는 장소가 되어야 하지만, 내 자식이 좀더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부모들 때문에 대부분의 유치원은 경쟁심을 부축이며 지식을 가르치는 분위기로 일관하고 있다. 나도 “오늘 유치원에서 잘 놀았니” 하고 묻기에 앞서 “오늘 무슨 노래 배웠지? 하는 식의 세상살이 지식 축적 수준을 먼저 확인하고 있다.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음을 자주 느끼고 있으니 변화란 말처럼 쉽지는 않은 과제다.
조화롭게 세상과 어울려가며, 남보다 앞서가기 보다는 나보다 어려운 친구들을 조심스럽게 감싸주며 도울 줄 아는, 너그럽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짝사랑으로 그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뿐이다.
때이른 서리를 맞아 엉망이 된 무우를 걷으며 일찌감치 마무리했던 올해 농사는 옥수수를 기대이상으로 거두었을 뿐, 지난해에 비해 신통치 않았다.
봄에 손자녀석까지 한몫을 거들었기에 기대했던 콩 수확은 완전 백지로 결론이 나 버렸고, 팥 역시 비슷한 수준, 고구마는 지난해의 절반도 거두지 못했다.
지난 8월에 서울에는 25일인가를 흐리고 비가 뿌렸다고 하니 일조량 부족이 그 주된 원인이려니 하고 있지만, 그래도 주말마다 잠시 쉴 새 없이 밭에서 머물며 지냈고, 작년 수준의 비료도 주었는데, 실망이 컸다.
콩 밭에는 대표적인 해충인 잘룩 허리노린재가 지난해에 비해 눈에 많이 띄었지만, 사마귀 역시 기대이상으로 많이 보이기에 사마귀를 믿고 농약은 전혀 치지 않았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콩깍지는 달렸지만, 절반이상은 비어있고, 들어있는 깍지 역시 모두 거뭇거뭇 썩어있어 하나도 거두지 못하고 콩대 채로 그냥 밭에 꺾어 버리고 말았다.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올해 날씨가 궂어 콩 작황이 나쁘기도 하지만, 콩 역시 아무데나 심어서 그냥 거둘 수 있는게 아니고, 때 맞춰 농약도 뿌리고, 신경을 써 주어야 한단다.
나는 전업 농부가 아니니 수확량이 적든, 품질이 떨어지든 상관없이 건강한 수확물을 거두면 그만이기는 하다. 아직은 콩 몇 되를 더 거두자고 마스크 쓰고 농약 뿌리며 마음조리고 싶지 않다.
올해는 아내가 주말 농사 과정을 메모로 모두 남겨 놓았으니 내년 봄 농사부터는 좀더 계획성 있게 진행 할 수 있으려니 하는 희망을 해보지만, 모두가 하늘의 뜻에 달렸음을 실감할 수 있었던 한 해를 보내고 나니 자연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밭에 덮었던 검정 비닐을 걷어내니 내 마음도 개운해 졌다. 이른 봄부터 여름 내내 비닐 속에 덮여 있었으니 말은 못해도 얼마나 갑갑했겠냐고 아내는 말끔히 비닐을 걷어냈다.
비닐 속 흙은 무생물의 세계처럼 완전히 죽어있는 느낌이었다. 비닐을 덮지 않았던 고랑에는 여름 내내 잡초가 잘 자라 우리를 괴롭혔는데, 검정 색으로 덮은 비닐 속은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지난해 겨울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 몰랐던 사실이다.
아내는 겨울 동안이라도 숨을 쉬게 해줄 수 있으니 마음이 아주 시원스레 편해진다고 했다. 햇볕이 미치지 않는 비닐 속에서 숨죽이며 갑갑하게 갇혀 지냈을 수많은 생물을 머릿속에 그려보았기에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게다.
인간이 잠시 득세를 하고 있는 사이에 인간의 끝 없는 욕심으로 많은 생물들이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고 있지만, 세상살이 모두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정답은 아니다.
조화롭고 건강한 환경으로 텃밭 꾸리기를 내년에는 좀더 심각히 고민해 보고 싶다.
지난 주말까지 해서, 어느새 내 키를 넘기며 잘 익은 옥수수를 거의 다 거두었다. 풍암리 장터에서 모종을 사기도 하고, 양평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서 얻은 종자를 심었는데 미리 약품처리를 해서 상품화 해둔 탓인지 대부분 건강하게 잘 주었다. 봄에 퇴비를 주고, 한창 자랄 무렵 복합 비료를 조금, 종자 달릴 즈음 추비를 조금 더 준 것 외에 농약은 별도로 주지도 않았고, 막바지에 엄청 퍼지기 시작한 잡초도 제대로 뽑아주지 못했지만, 노력을 기울인 것에 비하면 엄청 잘 자라 훌륭히 2세를 남긴 녀석들을 거두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년생인 옥수수를 인간의 삶에 비하면 마냥 짧기만 하고, 한번 자리를 잡게 되면 꼼짝마라 그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생물인데, 제대로 돌봐주지도 않고 잘 거두기만을 기대했구나 하며, 뒤 늦게 반성을 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겨울이 워낙 추워서 그런지 올해 밭에는 벌레가 적게 끼었고, 고추에도 진딧물은 없었다. 지난해에는 옥수수를 갉아먹는 벌레를 별로 볼 수가 없었는데, 올해엔 옥수수 깊숙이 파고든 놈들이 수없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보다 조금 늦게 거두기 사작해서일까 모르지만, 식구들끼리 먹자고 기른 옥수수에 벌레가 낀 걸 보면서 오히려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옥수수 바로 옆 콩을 심은 고랑에는 지난해처럼 큼지막한 사마귀가 숨을 죽이고 여기저기 숨어있어 반갑기 이를데 없다. 귀농을 해서 농사를 짓는 분이 예전에는 예쁘게만 보았던 노랑나비, 배추 흰나비 같은 녀석들이 웬수처럼 보인다고 글을 적었던데, 흉측스럽게 보이던 사마귀가 어느새 반가운 손님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집 주변이나 밭에는 며칠만 발걸음을 소홀히 하면 거미줄이 사방에 쳐진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녀석들이다.
이미 고개를 숙인 벼가 자리를 잡고 있는 집 근처 논에는 농약을 뿌리느라 분주하던데, 나는 봄에 심은 과실 수 몇그루에서 열심히 잎을 갉아먹고 있는 벌레만 잡아내고 말았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그렇게 많이 번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 집 근처에는 농약을 거의 안 뿌린다는 소문이 난걸까 새파란 녀석들이 사방에 퍼져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자주 돌아볼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눈에 띄는 대로 잡아내면 되지 하다가도, 그 녀석들도 이세상에 나온 생명체인데 함께 나누어 주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복잡한 생각이 맴돌았다. 유난히 옥수수를 좋아하는 손자녀석은 지난해에 옥수수를 함께 따던 기억이 남아있어서 인지 옥수수 따러 가자 하면 정말 즐거워 하며 앞장서서 잡초가 수북한 밭으로 향했다.
농약을 안쳤으니 마음편히 따먹기도 하고 어린 녀석과 부담 없이 헤집고 다닐 수가 있지만, 아직도 징그럽게만 보이는 벌레가 자주 눈에 띄니 얼마큼을 양보하는 것이 지혜로운 농사법일까 정답은 멀고, 자꾸 망설여지기만 한다.어느새 어론리에서 세번째 봄을 맞고 있다.
조금씩 시골의 삶을 배워가고 있기에 이제는 농사준비에도 어렴풋이 계획이 잡혀간다.
주말 어론리에는 마을사람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듯 집 주변에는 농기계가
분주히 돌아다니고, 물을 받고 있는 논도 눈에 띄었다.
밭농사는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토요일 과천에서 사온 반송 100주, 적송 50주, 계수나무,
모감주 나무를 집 주변, 뒷 골짜기 땅에 심었다. 요령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진도도 낮고, 힘은
더 들고 고생스러웠지만, 종일토록 나무를 심는다고 고랑파고, 물주기를 하면서 몇 년 뒤
묘목이 당당하게 자리잡은 모습을 그리며 하루를 꼬박 마당에서 보냈다.
소나무는 아직 절반 정도를 더 심어야 하니 다음 주말에도 땅파기를 한참 더 해야 한다.
아내는 돌팔이 농사꾼을 거들면서 이런 일을 누가 강제로 시킨다면 힘들어 하겠냐고 하며
나중에 팔 방법은 있는 거냐고 했다.
잘 키웠다고 가정하고 몇 년 뒤에 팔 수 있게 될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전적으로
농사일에 생계를 걸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앞뒤 계산도 없이 일만 저지르는 내게 불평 한마디 없이 일방적인 도움이 노릇을 하고 있는
아내의 사랑을 또 한번 마음 깊이 느껴본 하루였다.
어론리 앞마당에 곤줄박이 몇 마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집을 마무리 할 무렵 갑자기 집안으로 날아 들어와 유리창에 몇 번 부딪히다가 무사히 빠져나가며 잠시나마 안타깝게 했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지난해 싱크대 배기관에 둥지를 틀었다가 우리 때문에 새끼치기를 실패한 녀석들이 다시 돌아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집 주변을 부지런히 맴돌며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배기관을 망으로 막아버렸으니 나무 위나 다른 곳에 둥지를 틀겠지만, 주말에만 들러서 소란스럽게 있다가 돌아가 버리는 우리들이 행여나 지난해처럼 새끼치기에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주일 전 주말, 풍암리 방앗간 콘크리트 지붕 슬래브 아래에서 제비집 두 채를 발견하고는 도대체 몇 년만에 보는거야 하며 아내랑 무척 반가워 했다. 아직 어론리에서 본적도 없는 제비가 우리 집에 둥지를 트는 것 까지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둥지는 아니더라도 이른 아침마다 어떤 녀석이든 재재거리는 새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으면 하고 기대를 해본다.
물을 먹으려 허밍버드가 집 주변으로 날아드는 모습을 미국 여행 중에 몇 번 보았던 아내는 우리도 새집이나 먹이줄 수 있는 뭘 만들어 보자고 한다. 집 짓고 남은 나무로 새집을 지어보려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받아놓고는 아직 시간이 없어 머릿속에서만 만들어 보고 있다.
새집을 인공으로 만들어 걸어주는 것이 새의 번식을 도와 자연보호에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인지, 오히려 방해를 하는 것인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야성을 잃지 않게 해 주면서 생존에 지장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란 결코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지난 토요일 과천의 묘목시장에 다녀왔다.
식목일을 앞둔 주말이어서일까 한식을 맞아서일까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제는 나무도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공산품이 아닌 나무를 인터넷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익숙하지도 않고 실물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탓에 교통 체증을 감수하고 눈으로 확인하러 간 것이다.
과천의 묘목시장에는 해마다 나무를 사러 오는 듯한 부부도 많이 눈에 띄었다.
추운 홍천에 나무를 심어야 할 상황이니 월동이 가능할까가 관심거리였는데, 횡성에 심을 나무를 고르던 어떤 부부가 아내를 보고는 감나무는 얼어 죽으니 절대 심지 마세요. 하더란다.
가을에 주렁주렁 달리는 감나무가 있는 옛 고향을 그리며 심었겠지만, 아직까지 영서지방에서는 감나무를 본 적이 없다. 지금처럼 온난화가 진행된다면 한 이십년 후에는 홍천에서도 감나무, 대나무나 배롱나무처럼 남쪽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를 홍천에서도 볼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사과, 배, 체리, 앵두, 개량 머루, 대추, 불두화, 벗나무, 구기자, 자두, 작약, 목단 등등 제법 많은 나무를 차에 실었다. 구근으로 칸나, 글라디올러스, 튤립, 다알리아를 사고나니 지난해에 여기저기서 구해둔 꽃 씨앗도 자리를 잡고 사방에 꽃이 피어나는 그림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 주일 전에는 풍암리 읍내에 들렀다가 산사나무, 팥배나무 어린 묘목을 스무 그루씩 사서 심었고, 홍천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과실수가 어떤 종류인지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기에 기대에 부풀어 몇 그루씩만을 시험 삼아심었지만, 삼년 뒤, 오년 뒤 봄이오면 가지마다 꽃이 피고 과일이 제법 달리는 나무들이 벌써 머릿속으로 어렴풋이 그려지니 아마 작은 꿈을 이루고 싶어하는 많은 부부들이 나처럼 묘목시장을 기웃거렸나 보다.
과일이 달리는 나무가 많으니 결국 병충해와 싸워야 하기마련이고, 이런저런 농약도 써야 할 상황이 닥쳐올지도 모르지만, 재미 삼아 심어보아도 되는 입장이니 그나마 조금은 다행이다.
아내랑 열심히 심은 묘목이 자리를 잘 잡고, 무 농약으로 버틸 수 있게 되기만을 조심스럽게 기대하면서 고단한 몸을 추스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최근에 호시노 미치오씨의 노던라이츠를 감명 깊게 읽었다. 야생사진 전문가로서 순수한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알래스카를 아끼던 인물이었기에 관심을 갖고 읽게 된 ‘바람 같은 이야기’, ‘여행하는 나무’에 이어 세 번째 책이다.
작가가 알래스카 인디언의 생활을 가까이 했기에, 그들의 생각에 공감을 했기에 남다른 시각으로 자연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글을 보면 알래스카의 자연에 묻혀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디언의 삶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캄차카 반도 취재 중 곰의 습격을 받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안타깝기도 하고, 더 이상 글을 남길 수 없게 되었기에, 누구보다도 알래스카의 자연을 사랑했던 그의 간절했던 마음이 더욱 소중히 느껴진다.
북극의 동물들, Animals of the North의 저자 빌 프루이트가 동일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정확히 1년 뒤였다. 이 책은 생물학 저서라기보다는 알래스카의 자연을 묘사한 거대한 서사시라고 표현하는 게 옳다.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이기에 나는 지금도 보물 1호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대목은 제 1장 ‘여행하는 나무’다. ‘여행하는 나무’의 주인공은 알래스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등피나무다. 이른 봄의 어느 날, 잣새 한 마리가 등피나무에 앉아 씨앗을 쪼아 먹는다. 낭비가로 유명한 이 새는 그날도 어김없이 씨앗들을 흘린다. 잣새가 떨어뜨린 씨앗 중 하나가 바람에 날려 우연히 페어뱅크스를 관통하는 체나 강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이름 모를 숲에 다다른다. 씨앗은 이 숲에 뿌리를 내리고, 세월이 흘러 거대한 성목으로 자라난다. 또다시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고, 매일 조금씩 강변을 침식하던 물살이 마침내 등피나무 뿌리를 적신다. 그렇게 또 겨울이 찾아오고, 봄이 되어 산의 눈이 녹고, 불어난 강물이 등피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린다. 등피나무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강물에 몸을 싣는다. 체나 강, 타나나 강, 유콘 강을 여행하던 등피나무는 베링 해까지 밀려간다. 북극 해류는 알래스카 내륙의 이름 모를 숲에서 태어난 등피나무를 북쪽 툰드라 지대의 해안에 내려놓는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툰드라 해변에서 등피나무는 그곳의 랜드마크가 된다. 우연히 등피나무를 발견한 여우가 해변에 올 때마다 등피나무 줄기에 영역을 표시하고 돌아갔다. 어느 겨울날 여우 발자국을 따라온 에스키모가 등피나무에 올가미를 친다….. 등피나무의 여행은 툰드라 벌판에 외로이 서있는 작은 오두막집의 난로에서 불태워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것이 여행의 끝은 아니었다. 재가 되어 대기로 날아간 등피나무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이 책에 흐르고 있는 극북의 신비로운 정취는 내 가슴속에서 알래스카에 대한 동경으로 거듭났다.
작가 본인도 한 그루의 등피나무가 되어 시간의 여행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그 여행을 마치고 말았다.
작가가 빌 프루이트의 글에 공감을 했던 이유가 내가 세상살이 인연에 대해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생각과 같은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의 삶도 등피나무의 여행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세상에 태어나 알게 모르게 고리처럼 연결된 인연을 따라 성장하여 배필을 만나 자식도 낳고,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며 살다가 세상을 뜨게 되면 다시 자식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그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꼭 같다.
몇 년전 미국 여행 중 제가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깜짝 놀랐던 그 덩치 큰 시커먼 무스(Moose)를 혹시 작가가 오래 전에 알래스카에서 카메라에 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스쳐갑니다.
작가는 ‘여행하는 나무’ 의 맨 마지막에 남긴 글, ‘물망초…. 알라스카에서 보낸시간’ 을 보니 우리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라는 숙제를 남겨두었다.
결과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는 단어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결과에 상관없이 지나온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진정 의미를 갖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렇게 쌓인 시간들이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생일 것이다.
볼을 스치는 북극 바람의 감촉, 여름철 툰드라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 백야의 엷은 빛, 못 보고 지나칠 뻔한 작은 물망초….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에 마음을 조금 얹어서 오감의 기억 속에 남기고 싶다. 아무것도 낳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누리고 싶다. 경황 없는 세상의 삶과 평행을 이루며 또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마음 어디에선가 항상 느끼면서 살고 싶다. 그 소중한 시간들을 언젠가 내 아이에게도 전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