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서 소근소근'에 해당되는 글 122건
- 2009.09.03 부부로 사는 인연이란?
- 2009.05.07 손자녀석의 홍천 나들이
- 2009.05.07 홍천집 첫손님은?
- 2009.05.07 작은 꿈을 이루며…
- 2009.04.27 홍천에 땅 구하게 된 이야기
- 2009.02.12 내가 꾸는 꿈은?
- 2009.02.12 부처를 곁에 두고 보기
- 2009.02.02 이런이야기를 듣게되니...
- 2008.12.30 올해 농사를 결산해보면...
- 2008.12.30 손자녀석 돌잔치를 지켜보며
며칠전 TV에서 80살 동갑내기 부부의 생활을 취재한 프로를 보았다. 남편이 먼저 건강에 문제가 생겨 아내가 온갖 수단을 다해서 회복을 시킨 이후, 어떤 이유인지 아내가 쓰러져 이번에는 남편이 반신불수인 아내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게 되어 힘겹지만 아름답게 꾸려가는 생활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차를 몰아 바람도 쐬고, 병원도 함께 가고, 집안일 모두를 해가며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아내를 돌보는 모습은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었다. 목욕시키고, 화장품을 발라주고 거울을 보여주니 아내가 머리칼을 만져보며, 파뿌리가 되었네 하는 장면은 몸이 불편하더라도 마음으로 얼마든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즘 주변에 보면 서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가정을 포기하는 젊은 부부가 의외로 많다. 동물의 세계를 찍은 다큐멘터리 프로를 보면 평생을 함께 사는 동물도 많은데, 어째서 사람만이 약속을 어기며 각자의 길을 가려는 걸까?
부부가 함께 해로를 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나 될까? 평균수명이 최근 엄청 길어져 여든을 넘겨 산다고 보고 서른 즈음에 부부가 된다고 가정을 하면, 40년에서 길면 50년 정도가 함께 할 수 있는 기간이 된다. 다정한 부부라면 짧을 수도 있겠고, 사이가 그저 그런 또는 문제 있는 부부라면 길게만 느껴질 기간일 수도 있겠지만, 30년 넘게 결혼 생활을 이어온 나를 돌아보면 50년도 짧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어디서 들었는지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건 70세 정도가 고작이라 한다며 우리는 이제 15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고 했다.
어찌 보면 15년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고, 얼마든지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세월이다. 남은 햇수가 얼마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보내느냐에 가치를 두고 보아야 하는데, 웬지 15년이란 숫자에 마음이 쓰이며, 짧게 느껴지기만 한다.
주변에서는 자식 농사 모두 끝냈고, 이젠 남은 세월 즐길 일만 남았네요 하며 부럽다고 하고 있지만, 홍천에 집 짓기를 마치고 나니 손바닥만한 밭이라 해도 돌팔이가 농사일을 시작, 아내의 일꺼리를 엄청 늘렸고, 내가 마무리 해야 할 일도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사는게 다 그런 것 아니냐 하며 쉽게 여길 수도 있지만, 과연 지금처럼 사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인지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작다고는 하나 두집살이를 시작한 후 생활 패턴은 완전히 바뀌었다. 긍정적으로만 본다면 주말에는 조용한 곳에서 모든 것 내려 놓고 쉴 수도 있겠고 부정적으로 본다면 끝없이 일꺼리가 밀려 있는 생활의 연속이니 이런걸 사서 고생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식들에게 부부간 서로에게 양보하며 마음 열고 귀 기울이며 살아라 하며 강조하고 있지만, 돈 안 되는 커다란 장난감을 만들어 놓고는 수습이 쉽지 않은 일만 자꾸 벌이고 있는 나를 돌아보니, 내가 아내에게 그렇게 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다. 오직 아내의 양보와 끈질긴 인내력만을 무한정 기대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 것이다.
지난 월요일, 이제 세상에 나와 한 살 반정도 된 손자녀석이 마무리가 한창인 집 짓기 현장에 나들이를 왔다. 어느새 옆 개울에는 어린 무당개구리들이 천방지축 돌아다니고 있고,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나비들이 제법 많이 날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아파트 주변에서 모래를 만져보기 시작한 녀석은 시골의 흙 바닥을 신기해 했고, 익숙치 않은 분위기에 한동안 망설이며 조심스러워 했다. 점심때 풍암리 장날 나들이까지 해서 검정 고무신까지 얻어 신은 녀석은 신나게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구경꺼리을 찾으며 놀더니 결국에는 앞마당에 쌓인 모래더미에서 미끄럼을 타는 수준까지 몇 시간 만에 발전했다. 일단 익숙해진 뒤로는 모래, 흙 만지기에 몰입하는 모습을 본 식구들은 어린애들에게는 역시 흙장난을 하며 뛰어 놀 수 있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우리 애들도 어릴 때 그랬지만, 어린애들은 대부분 흙장난을 좋아한다. 흙이란 우리 인간과 아주 가까운 관계요, 본능적으로 이미 적응이 되어있는 우리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감이 별로 없던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앞마당 모래밭에서 고무신 신고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께~~ 집짓기 하며 놀던 것이 중요한 놀이 감이었는데, 이제 서울에서는 아파트 한구석에 모래밭을 겨우 모양새로 갖추어 놓았을 뿐이고, 흙을 밟아보기는 힘들어 졌다.
요즘의 어린애 들은 컴퓨터 게임 같은 재미있는 놀이에 정신 없이 빠져들 수도 있겠고, 지식의 홍수 속에 IT 시대를 살면서 편리한 면도 많이 있겠지만 흙 내음을 맡을 기회는 거의 사라졌다. 시골에 가면 젊은 부부나 어린애를 만나보기 드물게 되었고, 농사는 노인들 몫이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어론리 역시 주변에서 만나는 노인들 연세를 보면, 앞으로 10~15년 정도 뒤에는 누가 농사일을 꾸려 나갈지 모르겠다.
아내와 요즘의 주요 화제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서울과 시골의 생활을 조화롭게 꾸려갈 것인가? 손자녀석 성장 환경을 어떻게 보살펴 줄 것인가 이다. 시골 어린이들과 서울 어린이들의 생활 환경은 아주 차이가 많다. 흙내음도 맡고, 도시 생활도 하며 어느 정도 절충을 할 수 있다면 바람직하겠는데, 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론일 뿐이다.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숙제다.
지난주 집안 바닥미장 작업 중에 집안을 둘러보니 새똥이 벽에 묻어있었다. 첫 손님으로 맞은 동물은 이름 모를 새가 된 것이다. 공사 중 집 주변에는 할미새처럼 보이는 작은 녀석이 눈에 띄었는데, 그 녀석일지도 모른다.
지난 월요일에는 부엌 처마 가까이에 벌 한 마리가 집을 짓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찾아준 이웃이 된 셈이지만, 마침 손자랑 나들이를 왔던 큰 아들이 벌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새를 틈타 뜯어내 버렸다. 어제 아침부터 외벽 페인트 작업을 시작했는데, 구들방 창틀에 또 다시 벌집을 짓고 있었다. 전날 본 그 녀석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비를 안 맞는 처마 밑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위험해 보이는 벌집이니 결국 헐어야 한다.
현관 앞을 정리하다 보니 조그만 생쥐 새끼 한 마리가 숨어있다가 화들짝 놀라 숨어버린다.
별로 반갑지 않은 녀석인데, 앞으로 어떻게 함께 지내야 할지 아직 전혀 모르겠다.
웬지 남의 보금자리를 빼앗아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 양보하는 절충안이 생기게 되고, 함께 어울려 사는 분위기도 조성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런 기대를 한다.
이른 아침안개를 뚫고 여러 종류의 새소리가 집 주변에서 울려 퍼졌는데
아내는 새벽녘 집 주변에서 짐승의 기척을 느꼈다고 했는데, 지난해 가을, 옥수수를 갉아 먹어버린 녀석이 아닐까 짐작을 해 보았다.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지금, 사람의 마음에 안 드는 생물체는 모두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제거되고 있다. 예쁜 꽃을 피우는 야생화도 밭에 자리를 잡게 되면 잡초가 된다. 잔디도 풀, 야생화도 풀인데, 잔디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초제 세례를 받고 밀려나야 한다. 노루나 고라니 같은 산 짐승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조금씩 나누어 먹으면 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밭을 전용하여 집을 지은 나 역시 그들에게는 침입자요, 방해자가 되었지만, 어떤 방법으로든지 서로 도우며 살고 싶다. 겨울철에 먹이를 주며 생존을 돕는 것이 주변 동물에게 과연 도움을 주는 행동이 될지 어떨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욕심 줄이고 나누는 방법을 찾아 보는 것 만이 지금 찾을 수 있는 최선책이려니 해 본다.
홍천에 시골생활을 위한 집 짓기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머릿속에 집을 짓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집을 짓는 두달 남짓 되는 기간 내내 이런 저런 망설임이 나를 괴롭혔다. 기왕에 집을 짓는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때가 되면 시골에서 조용히 살겠다는 것이 주된 목적인데, 돈 들일 필요가 있을까? 어디까지가 낭비이고, 사치인가? 나중에 혹시 정리를 하게 될 경우를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할까?
집 한 채도 거느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쩌다가 욕심을 내다보니 비록 크지는 않다고 하나 두 채를 거느린 사치스런 사람이 된 것이다.
처음 기초 공사를 시작할 무렵 동네 어른들은 땅 넓은데 크게 짓지 그러냐고 한마디씩을 하셨지만, 이제는 주로 둘이서만 지낸다면 적당하겠다 라고 기준이 바뀌었다. 기초를 닦을 때 손바닥 같던 바닥면적이 외형을 갖추면서 제법 커 보이는 것도 있겠고, 작더라도 방이 두 개라면 웬만한 손님 맞이는 되겠다는 공감을 하게 된 탓이리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만든 구들방에 대해서, 나이든 사람들은 대부분 아직 구들방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기에 그렇겠지만, 장작을 앞으로 어떻게 댈꺼냐고 걱정을 하면서도 구들방 만든 건 잘한거라고 한편으로는 인정을 해 주신다.
지난 겨울, 주변의 산 주인과 산림청에서 나무를 벌목하며 근처의 산과 옆 개울을 많이 망가뜨려 걱정을 했었는데, 얼마전 도롱뇽 알을 발견하고는 아내가 무척 반가워했다. 한 두 해 지나면 집 주위와 뒷 골짜기는 웬만큼 회복이 되겠지만, 나 역시 공해를 유발하는 새로운 근원 중에 하나로 슬그머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어차피 옛날로 되돌릴 수는 없게 되었고, 어떻게든 환경을 보존하도록 조심하면서 최소한으로 지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남들은 어떤 꿈을 꾸면서 살고 있을까? 물론 본인이 처한 수준보다 더욱 행복을 느끼기 위한 방편을 찾는 것을 꿈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룬 작은 꿈이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며 또 다른 꿈을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새로 생겨나는 꿈이 그저 꿈으로 머물게 될지, 남이 보면 배부른 자의 커다란 욕심이 될지 아직 모르지만, 이룰 수 있는 소박한 수준으로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
오래 전부터 나이 들면 서울에서 반드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는데, 오랜 세월 다녔던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할 시기가 다가오니 낙향이야 천천히 하게 되더라도 일차로 땅이라도 사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 졌다. 우선 서울에서 탈출하기 위한 땅의 조건을 몇 가지 정해 놓고 찾기 시작했다. 천리 밖 지역의 땅 시세를 미리 알아 볼 수도 있고, 부지런한 부동산 업체에서는 부족하기는 하지만 사진도 올려 놓고 하기에 눈으로 사전 답사를 할 수도 있는 인터넷 만능세상이라는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장점만을 부각시켜 매물소개를 해 놓았으니, 과연 몇% 정도를 믿어야 할지 처음에는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조금씩 땅을 보는 눈이 떠짐을 여러 부동산을 다니면서 느낄 수 있게 되니 조금씩 자신감도 생겼고, 땅을 평가하는 잣대도 조금씩 분명해졌다.
- 남향 또는 동남향으로 아늑하고, 양지 바른 곳
- 개울은 가까이 없더라도 되도록 뒤로 산을 등지고 있는 땅
- 동쪽이 낮아 이른 아침부터 햇빛을 받을 수 있는 곳
- 비록 작더라도 텃밭이 있어서 뭔가를 꼼지락거릴 수 있어야 한다.
- 주변에 공해를 유발 하는 업체는 없어야 한다.
- 축사 같은 오염원은 되도록 멀리 있어야 되겠다.
- 식수는 해결 되는 곳
- 도로의 자동차 소음은 심하지 않아야 하고, 도로 보다는 낮지 않은 땅
- 너무 외진 곳은 되도록 피하자.
- 수맥이 집터에서 비켜야 한다.
- 송전선 철탑 같은 기분이 편하지 않은 시설물과는 멀어야 한다.
부동산은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지역부터 인터넷에서 찾기 시작했는데, 친구가 살고 있는 양평읍 부근의
이곳 저곳 부동산을 들러보며 느낀 것은 대부분의 부동산 업자란 거래가 성사되면 무조건 수수료를 챙길 수 있으므로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땅의 위치나 미래의 상품가치를 부풀려 말하려 하고, 단점은 철저히 감춘다는 것이었다.
워낙 부동산 분야에 어둡다 보니 거래 허가지역으로 묶여서 거래가 극히 제한되어있는 지역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업자의 추천보다는 본인의 안목으로 결정을 하는 것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만난 설악면의 양심적인 부동산 업자가 추천한 지역이 비록 멀기는 하지만, 머지않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투자가치 면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홍천군이었다.
홍천군은 군대 생활 시절이래로 결혼 후 아이들과 여름휴가철에 자주 지나다녔던 곳이기에 낯설지 않았고, 산세 좋고, 공해와는 거리가 멀 것으로 판단되어 적극적으로 수소문을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서 만났던 한 홍천 읍내의 한 부동산 업자와 땅을 보러 가는 길에 눈길에 미끄러져서 차가 뒤집히는 사고를 만나기도 했고, 다섯 개 업소를 찾아 주말마다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녔다.
결국 한 업소에서 소개해준 작은 골짜기 입구에 삼각주처럼 자리잡은 땅을 매입하게 되었다. 땅이던 집이던 눈에 뭐가 씌워지던가 귀신에 홀려야 사게 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나 역시 이른 아침 뿌연 안개가 걷히며 양지바르게 해가 비치는 멋지게만 보이는 땅에 홀려서 결국 시세보다 훨씬 비싼듯한 가격에 덜컥 계약을 하게 된 것이다.
골짜기를 따라 뒷산에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봄날 우산을 쓰고 올라가 보았는데. 골짜기 뒤로 펼쳐진 그다지 높지 않은 뒷산은 무인지경이었다. 매발톱, 동의나물, 괭이눈 같은 야생화가 수없이 자라고 있고 산책 코스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름 모를 새소리 역시 나를 환영해주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계약 전에 마지막으로 마음을 굳히려 아내랑 함께 들렀던 날, 우연인지 땅 옆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에 곱새우가 보이고, 새로 부화한 듯한 어린 무당개구리들이 줄지어 계곡을 오르는 모습을 보고는 여기다 하며 완전히 마음을 정하게 되었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을 받아 절반을 조그마한 땅에 털어놓고 나니 모든 어려움 딛고 30년 직장 생활을 버텨 모을 수 있는 퇴직금이 겨우 요만한 땅을 살 수 있는 정도였나 하는 허무한 느낌이 한동안 머리 속에 가득했다. 꿋꿋이 내 곁을 지켜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음속에서는 어느새 집 짓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람마음이란 그렇게 쉽게 흔들리기도 하고, 가슴에 못이 박히는듯한 괴로움을 느꼈다가도 한편으로는 잊기도 하면서 정처 없이 흘러가는 것인가 보다.
손자 녀석이 간간히 꿈을 꾸는듯한 모습을 보이며 잠을 잔다.
아기들은 무슨 꿈을 꿀까 궁금하다. 만일 전생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종류의 꿈을 꿀 것만 같다. 영문도 모르며 야단 맞고 우는 꿈, 무엇인가를 이유 없이 빼앗긴 꿈, 넘어지거나 부딪혀서 놀라 울던 꿈… 나이 들면 점점 그 꿈은 복잡해지고, 끔찍해지기도 한다.
나는 지금도 절벽에서 떨어지는 어린애들 시절의 꿈을 가끔 꾼다. 신발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시험을 보는데 시간이 모자라 애를 먹기도 하고,,,
몇 년전 아내와 인도 여행을 다녀온 뒤 며칠간은 카메라를 들고 기막힌 경치를 찍으러 다니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아마도 잠재의식 속에서 상상하던 풍경이 꿈속에 눈앞에 펼쳐진 것인지는 몰라도, 그런 꿈을 꾸는 동안에는 행복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남들은 꿈을 흑백으로 꾼다던데, 나는 아직 어린애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지, 정신분열증 초기증세인지 컬러로 실감나게 꾼다.
어쩌다 너무나 괴로운 상황에 시달리는 꿈을 꾸게 되면 그 꿈 속에서도 이건 분명 꿈이야 하며 애써서 부정하다가 깨기도 한다.
꿈에 대해서는 이론도 많고, 꿈을 주제로 한 이야기도 무궁무진하게 많다.
아기들의 꿈은 과연 어떨까?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늘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걸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꿈이 아닐까?
꿈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꿈이란 단어가 재미있다. 밤에 잠자며 무의식 속에서 꾸는 것도 꿈, 낮에 의식 속에서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며 꾸는 것도 꿈이니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대부분은 꿈이 단순해지고, 어쩌면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수준으로 구체적으로 또는 축소되며 바뀐다.
지금 나의 꿈은 무엇일까? 이룰 수 있을 만큼의 소박한 꿈이라도 남아있는 지 모르겠다.
홍천 산골에 주말에 들러 이른 아침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식탁에서 아내랑 아내가 좋아하는 호두파이를 놓고 커피를 마시며 다음 여행 계획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꿈은 분명 이룰 수 있으려니 하고 있다.
남이 듣는다면 그게 어찌 소박한 꿈이냐고 뭐라할지 모르지만…
손자녀석이 제법 커서 돌이 지나니 나날이 말귀를 알아듣는 수준이 높아지고 있고, 어느새 어른들의 시선도 조금씩 의식하기 시작했다.
오래 전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가,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과거에 무심히 지나쳤던 중요한 사실들을 주말에 손자를 만날 적마다 하나 둘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다.
우리는 어린 아기를 부처라 하면서도 부처라 할 수밖에 없다는 참된 의미를 생각해 보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무심히 관념 속에 머물면서 그런 사실을 잊고 산다. 관념은 세상살이에 당연히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 관념의 바탕을 되돌아보지 않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얽매인다는데 있다. 과학이라는 단어에 맹신을 하고, 증명된 것처럼 인정받는 과학으로 밝혔음에 그냥 이끌려 가며 그 진실 여부를 잊게 되는 것처럼…
예절이나 도덕 같은 것은 세상살이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예절이나 도덕은 절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시대에 따라 또는 주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옳고 그름이 바뀔 수 있다. 어제의 중 죄인이 내일에는 무죄로 인정받기도 하고, 나의 입장에서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가하고, 가끔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른들의 세상이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게 되면 어른들은 아기에게 필요할 것으로 일방적으로 결정 한 후 옳고 그름을 뒤로 하고는 바로 지식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나 또한 그렇게 뭔가를 가르치고 있다. 아기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며 정확히 지금 이순간에 살아가고 있다. 잠시 후에는 이렇게 될꺼다, 내일에는 또 이렇게,,, 남이 보면 어쩌나,,, 이런 식의 관념에 사로잡힌 판단은 하지 않는다.
배고프면 울며 보채서 전혀 눈치보지 않으며 젖을 얻어 먹고, 졸리면 아무 때나, 어떤 상황에 처해있던 관계없이 눈을 붙인다. 위험한지 어떨지 알아보려 하지 않고 바로 입으로 가져간다. 그렇게 완벽한 부처로 머물고 있다가 조금씩 이런저런 앞뒤 계산을 하게 되고, 그간 배운 온갖 지식과 관념을 동원해서 판단을 하면서 생활하며 자신도 모르게 부처로부터 멀어져. 결국 자기가 부처였다는 사실조차 완벽하게 잊고는 이루지 못할 목표를 꿈꾸며 살아가게 된다.
세상살이에는 오름세와 내림세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은 공존 할 수 밖에는 없음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되겠지만, 지금의 교육제도, 입시제도는 오름세만을, 얻기만을 위한 방편은 가르치지만, 그 양면성을 일러주지는 않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성장하도록 도와주어야 할까? 정답 없는 의문이 줄지어 머릿속을 맴돈다.
어제 지금 충남지역에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는 아내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겨울 방학 당직차 출근을 했더니, 교장, 교감 선생의 점심값을 내야 하더라는 것.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라서 그럴리가 했더니 그 학교는 방학때 당직으로 출근한 당직 선생이 교장, 교감 선생의 점심을 사는 것이 불문율이라는 것이다. 이유가 뭔지, 원인이 뭔지 상상이 되지 않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금전 상납과 다를게 무언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서울서 출근 하려면 전철요금이 얼마냐 묻기에 2,300원이라고 하니, 교장 선생이 본인은 경로우대 공짜표를 받아 공짜로 타고 다닌다면서, 공짜로 타도 되는데, 왜 내고 다니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경로대우를 받지 못할 나이의 현역 공무원, 그중에서도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의 총 책임자가 양심건망증이 걸려 있다니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단돈 몇 백원이 아까워서 양심을 덮어버리는 한심스런 수준의 인물이 초등학교의 교장 지위까지 이를 수 있었다니 참으로 갑갑한 교육계 현실 아닌가?
그 선생이 제자들에게 도덕이란,,, 양심이란,,, 운운하며 가르쳤을 테니 그런 선생 밑에서 국민이고 뭐고를 모두 내던져 버린 권모술수만을 추구하는 요즘 같은 정치꾼들이 나오는 것 아닐까?
지금껏 나는 그런 선생님을 모셔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니, 정말 운 좋게 학교 생활을 마친 셈이다.
완전 초보 농사꾼 - 농사꾼이라는 표현조차도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으로 보낸금년 한 해를 돌아본다.
지난 봄 4월 말쯤 서석면 장날 일반고추, 파프리카, 피망, 상추, 호박고구마, 방울토마토, 가지, 호박, 옥수수 모종을 조금씩 사다가 심었다. 쑥갓은 충남 홍성의 무슨 축제인지 들렀다가 나누어준 씨앗을 조금 심어 보았는데 아주 싱싱하게 잘 자라 주어 늦가을에 노랑색 꽃까지 피워주었다.
아내는 어떻게 관리를 하려고 그렇게 많이 심었냐고 걱정 반, 기대 반 하는 말투로 내게 말했지만, 이웃 손선생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려니 하면서 이것저것 시험 삼아 심어 본 것이었다.
주말에나 겨우 둘러보게 되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손선생님께서 무슨 비료를 얼마나 주셨는지, 무슨 농약을 뿌리셨는지 모른다. 이러니 농사꾼이라는 표현이 전혀 안 어울린다고 할 수 밖에…
어쨌든, 옥수수는 모종 50개를 심어서 너구리와 나누어 먹고 30개쯤, 고구마는 라면 박스로 세개쯤, 고추, 호박, 파프리카 같은 것은 제법 많은 양을 거두었다.
상추, 쑥갓은 여름 한철 내내 실컷 먹을 수 있었고, 고추, 가지는 많이 달려 여러 집에 나누어 주어야 했다.
매운 것을 못 먹으니 고추는 먹은 것보다 버린 것이 많았던 것 같은데, 볕도 잘 들지 않는 골짜기 한구석에서 기대이상으로 많은 수확을 했다.
막바지에 잘 익은 고추는 아파트 베란다, 거실을 옮겨 다니며 겨우겨우 말려 놓았다.
고구마는 겨울철에 잎이나 보려고 물에 담가 놓았는데, 어느새 아주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모종을 심고 나서 느낀바 있었지만, 식물의 생명력이 그렇게 대단한가 몰랐다.
홍천~서울을 다니며 거두어온 수확물로 여름 내내 냉장고 채소박스는 그득했고, 덕분에 채소는 여러 가지로 무한정 먹을 수 있었다.
내년에는 얼마나 농사일을 펼치게 될지 아직 모르지만 올해만큼은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집을 짓게 되면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늘게 되고, 그만큼 밭을 돌볼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지니 최소한 올해 수준은 유지 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내년엔 고구마는 어떻게 심어야겠다, 옥수수는… 하고 나름대로 요령도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철없는 하룻강아지 농사꾼이다 보니 날씨만 허락한다면 들어가는 노동력만큼 거둘 수 있는 것이 농사일이라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려보게 된다.
이제는 알아듣는 말도 늘어나 재롱 잔치의 수준도 나날이 향상되고 있는데, 아내와 나누는 대화에도 그 녀석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며칠 전 부서의 직원 아이가 외고에 합격 했다 하기에 축하를 하다가, 갑갑한 이야기를 들었다. 외고 생활을 미리 준비시키려고 고교수학 과정을 지도하는 학원을 보내려 했더니, 중3이면 수강생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편이더라 하면서 걱정스런 말을 하기에 아니 재수도 안 했는데 무슨 뜻인가? 물었더니, 고등학교 수학을 초등학생들이 배우러 다닌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걱정스럽게 여기고는 있었지만, 초등학생이 고등학교 수학을 미리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천재가 아닌 일반 초등학생이 미적분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언젠가 TV 에서 인도의 입시지옥에 대해 본적이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은 인도의 명문학교 진학 전쟁 수준은 이미 오래 전에 넘어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내는 홍성의 시골학교에서 열 몇 명을 한 반에 놓고 집인 식구처럼 가르치다가 한 반에 30명이 넘는 천안 근교에 있는 학교로 옮기더니 그 지역 학교, 학원, 학부형들의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고 있는데, 불과 몇 년 후가 되면 손자녀석이 그런 환경에 노출되며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것이 더욱 갑갑하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맞벌이 부모가 처한 문제점은 자녀의 교육환경에 직결되고 있으니 걱정스런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초등학교 일학년부터 시험을 쳐야 하는 해괴한 교육제도가 곧 피부에 와 닺는 처지가 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일년 내내 공포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6학년 담임 선생님의 성함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 시기의 괴로움이 너무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 시절에는 광화문 네거리 근처의 서울 덕수 국민학교의 명성이 자자 했는데, 전에 덕수 국민학교에서 가르쳤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준 정신병 환자 정도로만 뇌리에 남아있다. 시험은 왜 그렇게 자주 보았는지 몰라도 시험 성적이 집계가 될 때쯤이면 매맞을 생각을 해야 했다. 점수와 관계없이 석차가 오르내림에 따라 얻어맞아야 하는 몽둥이 수가 정해졌다. 석차가 내린 수만큼 몽둥이(물걸레질하는 청소 막대)로 머리통을 맞았는데 한대씩 맞을 적마다 그 충격으로 귀속에서는 윙윙하는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고, 여기저기 혹이 툭툭 돋았다. 석차가 오르면 다음에 내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오히려 제자리에 머물기를 바랬고, 석차가 올라 맞지 않아도 되는 결과가 나오면 석차가 오른 나 때문에 맞아야 하는 반 친구들의 걱정스런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함께 수없이 몽둥이를 맞아야 했다. 점수가 올라도 석차가 내리면 무조건 맞아야 했으니 늘 억울했다. 석차가 오르면 다음 시험이 걱정되었고, 내리면 맞아야 했으니 두려웠고, 선생님이라기 보다는 몽둥이질을 즐기는 악마라는 이미지로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초등학교 6학년 어린애들을 두들기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아니었던 것 같고 그저 이름있는 학교에 제자를 많이 들여보냈다는 자부심을 누려보기 위해 그렇게 제자들을 몽둥이로 그것도 하필이면 머리통을 골라서 때린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어찌되었을까? 이미 교육청에 고발을 당해 된서리를 몇 번이고 맞았을 처지였겠고, 아마 인터넷에 올라 난도질을 당하고도 남았을 교육방법이었다. 그렇게 수없이 맞고도 집에 돌아와서 누구에게 일러보려 해본 적이 없는데, 요즘이라면 어찌 했을지 나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무작정 매질을 하는 교육환경은 면한 것 같은데, 성폭력이니 어쩌니 예전에는 들어볼 수 조차 없었던 고약스런 분위기로 바뀌었고, 인성교육은 멀어진지 오래고, 그저 성적순으로 제자를 줄 세우는, 아니 줄을 세울 수밖에 없는 교육으로 전락했다. 예전에는 온 가족의 축하와 함께 시작했던 초등학교 일학년이 성적순 줄서기 연습장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까지 6년 정도 남았는데, 그 동안 학교 교육 정책이 바뀌기를 기대해 봐야 소용없겠고, 그 분위기를 이겨내는 용기와 인내심을 키워주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