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서 소근소근/비처럼 음악처럼'에 해당되는 글 121건
- 2007.03.23 우연 또는 필연?
- 2007.03.14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둘째권)을 읽고.
- 2006.12.27 세상에 태어났다면 끝없이 전진하라.
- 2006.12.22 한해를 보내며
- 2006.12.12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을 읽고.
- 2006.11.16 앎이란?
- 2006.10.04 글이란?
- 2006.09.27 일본을 다녀오고나니...
- 2006.07.13 "인생수업"에서 옮겨온 글-2
- 2006.07.13 "인생수업"에서 옮겨온 글-1
오래 전 사진작가 강운구씨가 열었던 사진전의 Title이었다. 강원도 산골에 사는
노인들을 찍은 흑백 사진을 주제로 해서 전시를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때 어느 노인의 굳은살 박힌 손을 찍은 사진이 걸렸었다.
그런 노인을 만나 사진을 찍게 된 것이 우연일까 또는 필연일까 하는 의문을
사진전 Title로 잡게 되었다는 글은 본 기억이 어렴풋하다.
아침 출근길에 뒷산에 피고 있는 산수유 꽃을 보았다. 봄이 되었기에 스스로 꽃을
피우는 자연현상이라고 보기에는 우리가 모를 대자연의 섭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세상을 스스로 돌아가고, 인간이 스스로
처해진 굴레 속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려도 결국은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살게
마련이니, 지금 내가 언젠가는 서울을 벗어나고파서 여기저기 부동산 중개업소를
기웃거리며 수소문하고 다니게 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부동산을 중개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노인들을 찍은 흑백 사진을 주제로 해서 전시를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때 어느 노인의 굳은살 박힌 손을 찍은 사진이 걸렸었다.
그런 노인을 만나 사진을 찍게 된 것이 우연일까 또는 필연일까 하는 의문을
사진전 Title로 잡게 되었다는 글은 본 기억이 어렴풋하다.
아침 출근길에 뒷산에 피고 있는 산수유 꽃을 보았다. 봄이 되었기에 스스로 꽃을
피우는 자연현상이라고 보기에는 우리가 모를 대자연의 섭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세상을 스스로 돌아가고, 인간이 스스로
처해진 굴레 속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려도 결국은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살게
마련이니, 지금 내가 언젠가는 서울을 벗어나고파서 여기저기 부동산 중개업소를
기웃거리며 수소문하고 다니게 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부동산을 중개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박경철이라는 의사가 쓰는 글에는 남다른 호소력이 있다. 평론가들처럼 의식적으로
어려운 낱말을 골라 쓰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수준의 단어와 알아보기 쉽게 쓰려는
흔적이 뚜렷한 의학용어가 친절하게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단지 허물을 벗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죽게 될 때 마지막 남은 이 몸뚱이를 어떤 방법으로든 세상과 나눌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지금껏 세상을 살면서 남에게 이로운
일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나마 뭔가를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내 작은 녀석은 언제부터인지 장기기증증서를 지갑에 넣고 다닌다. 어떤 동기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면에서는 나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다.
자신의 유언장을 미리 써보면 어떻더라 하는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고, 그런
내용을 엮어서 만든 책도 있다. 대부분 본인의 시신은 어떻게 해달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많은 이들이 화장을 해서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원하고 있다.
화장을 할 바에야 몸의 일부분이라도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고 가는 것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의미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주변에는 의사로 생을 마치면서 본인의 시신을 기증하려 하던 분이 계셨는데,
자식들이 거부해서 마지막 소망을 이루지 못하셨다.
죽고 나면 내 몸뚱이마저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고 실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내 몸뚱이를 내 원하는 바 대로 처분하게 될까?
어려운 낱말을 골라 쓰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수준의 단어와 알아보기 쉽게 쓰려는
흔적이 뚜렷한 의학용어가 친절하게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단지 허물을 벗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죽게 될 때 마지막 남은 이 몸뚱이를 어떤 방법으로든 세상과 나눌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지금껏 세상을 살면서 남에게 이로운
일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나마 뭔가를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내 작은 녀석은 언제부터인지 장기기증증서를 지갑에 넣고 다닌다. 어떤 동기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면에서는 나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다.
자신의 유언장을 미리 써보면 어떻더라 하는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고, 그런
내용을 엮어서 만든 책도 있다. 대부분 본인의 시신은 어떻게 해달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많은 이들이 화장을 해서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원하고 있다.
화장을 할 바에야 몸의 일부분이라도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고 가는 것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의미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주변에는 의사로 생을 마치면서 본인의 시신을 기증하려 하던 분이 계셨는데,
자식들이 거부해서 마지막 소망을 이루지 못하셨다.
죽고 나면 내 몸뚱이마저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고 실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내 몸뚱이를 내 원하는 바 대로 처분하게 될까?
학교 선생으로서 제대로된 제자를 하나라도 건질 수 있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여기에 옮겨 놓았다.
스님들 역시 반야를 얻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으로 목숨 걸고 용맹 정진을
하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
세상에 태어났다면 끝없이 전진하라.
박경철, 안동 신세계 연합병원 원장(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의 저자)
원아 세세 생생처 상어반야 불퇴전(願我 世世 生生處 尙於般若 不退轉). 이 글은 고등학교
시절 국어선생님께서 칠판에 써 주셨던 구절이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 까지는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겠노라” 라는 뜻인데, 고려시대
보우국사의 발원문중의 하나다.
고려시대 불교에 중요한 위치를 가졌던 보우국사는 자신이 세속을 떠나 머리를 깎으면서
이 글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내 꿈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칠판에 쓰신 이 구절은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머릿속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반드시 이루고 싶은 무엇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물러서지 않고
싸우겠다는 각오 정도는 있어야 한세상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선생님의
부연설명은 내 인생의 행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본래 창조의 자질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고작 1퍼센트에 불과하다. 나는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이루어야 할 그것을 찾을 수 없었고, 설령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거창한 목표는 내가 가진 능력의 밖이었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평범하게 살자니 보우국사의 호통이 머릿속을 떠돌고, 그렇다고
능력이 따르지 못하는데 허망한 꿈만 꾸자니 물러서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항상 내 그릇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목표를 세우자. 그리고 꼭 이루자.
그 다음에는 좀더 큰 목표를 세우자. 그것을 쉬지 말자. 그것도 바로 불퇴전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의사가 되었으며, 재테크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하는 생각이 들어 여기에 옮겨 놓았다.
스님들 역시 반야를 얻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으로 목숨 걸고 용맹 정진을
하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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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났다면 끝없이 전진하라.
박경철, 안동 신세계 연합병원 원장(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의 저자)
원아 세세 생생처 상어반야 불퇴전(願我 世世 生生處 尙於般若 不退轉). 이 글은 고등학교
시절 국어선생님께서 칠판에 써 주셨던 구절이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 까지는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겠노라” 라는 뜻인데, 고려시대
보우국사의 발원문중의 하나다.
고려시대 불교에 중요한 위치를 가졌던 보우국사는 자신이 세속을 떠나 머리를 깎으면서
이 글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내 꿈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칠판에 쓰신 이 구절은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머릿속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반드시 이루고 싶은 무엇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물러서지 않고
싸우겠다는 각오 정도는 있어야 한세상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선생님의
부연설명은 내 인생의 행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본래 창조의 자질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고작 1퍼센트에 불과하다. 나는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이루어야 할 그것을 찾을 수 없었고, 설령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거창한 목표는 내가 가진 능력의 밖이었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평범하게 살자니 보우국사의 호통이 머릿속을 떠돌고, 그렇다고
능력이 따르지 못하는데 허망한 꿈만 꾸자니 물러서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항상 내 그릇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목표를 세우자. 그리고 꼭 이루자.
그 다음에는 좀더 큰 목표를 세우자. 그것을 쉬지 말자. 그것도 바로 불퇴전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의사가 되었으며, 재테크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어느새 팥죽을 먹는 동짓날이 되었다.
참 세월은 빠르다. 21세기가 시작되네 어쩌네 소란스러웠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07년을 맞고 있으니...
한 해를 보낼 무렵이 되면 누구나 지난해를 반성하고, 새해를 맞으며 계획도 세우고 마음으로나마 분주해 지기도 하는데, 올해엔 그런 느낌이 없이 한 해를 접고 있다.
하지만, 새해에는 몇 가지 일정이 정해졌다.
2월 말쯤 사내에서 사진 전시회를 가지려는 계획과 3월 말로 30년 끈질기게 근무한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하게 되는 과정이다.
사진전을 열면서 30년 직장생활을 정리해 보려는 의도가 어떻게 남들에게 받아
들여질 지는 모르지만 어떤 결과가 되든, 그간 이런저런 기회로 사진에 담아 두었던 기록을 내다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남들에게 솜씨를 자랑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지만, 오래 전부터 후배들에게 반드시 해야 한다고, 지금부터 해야 한다고 하던 취미생활의 일부를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도 사진전을 여는 이유 중에 하나다.
어쩌면 치졸한듯한 수준의 사진을 거는 것이 남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고, 누구라도 사진은 찍을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도 사진이라는 세계를 가깝게 해 줄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닌가 하는 욕심도 생긴다.
사진전에 걸을 글을 미리 적어보았다. 쑥스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어렴풋이 그려온 은퇴 기념 사진전이 내게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아직 사진을 스캔하며 고르고 있지만 서문을 적었으니 절반은 마친셈이다.
*******************************************************************
사진전을 열며
어느새 소리 없이 지나가 버린 30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틈틈이 찍어두었던
사진을 모아 사진전을 열게 되었다. 그간 많은 선배, 동료, 후배들과 함께 생활하며 느낀 것은 나는 복 받은 사람이란 것이다. 이제 그 많은 복 중 일부를 사진에 담아 걸 수 있게 되었다.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 준 동료 여러분과 회사의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지나간 삶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숨은 지원자인 아내, 가족, 주위 동료들의 너그러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준 모든 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분야도 아날로그 시대에서 순식간에 디지털 만능세대로 바뀌어 누구나 쉽게 사진을 가까이하는 시절이 왔다. 이런 기회를 통하여 추억거리를 좀더 멋지게 남기는 방법을 소개해 보고 싶었다.
아마추어의 솜씨이기에 부끄러운 수준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를 해 주려니 하는 소박한 마음에 그간 찍었던 수많은 사진 중에서 일부를 골랐다.
사진이라는 세계를 소개하고, 누구나 관심만 있으면 바로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 사진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여겨져, 주변에서 쉽게 만나게 되는 소재를 다양하게 선택해 본 것이다.
사진활동이란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취미임을 공감하고 싶은 것이다.
“정말 오래 근무하셨네요” 하는 것이 요즘 자주 듣게 되는 인사말이다.
법정스님의 글에서 옮겨온 내용으로 답변을 대신하려고 한다.
1959년 티베트에서 중국의 침략을 피해 80이 넘은 노스님이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 왔었다.
그때 기자들이 놀라서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험준한 히말라야를 아무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까?”
그 노스님의 대답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자신의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단다.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걸음 내딛으면서 산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내딛느냐에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을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가?
우리의 삶은 한 걸음씩 어디론지 향해 걷고 있다. 직장 생활 역시 목표를 세우고 한걸음씩, 하루씩 쌓아 가는 것이다. 사진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장 한장 매 순간 집중해서 기록으로 남겨가는 것이 사진이기 때문이다.
참 세월은 빠르다. 21세기가 시작되네 어쩌네 소란스러웠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07년을 맞고 있으니...
한 해를 보낼 무렵이 되면 누구나 지난해를 반성하고, 새해를 맞으며 계획도 세우고 마음으로나마 분주해 지기도 하는데, 올해엔 그런 느낌이 없이 한 해를 접고 있다.
하지만, 새해에는 몇 가지 일정이 정해졌다.
2월 말쯤 사내에서 사진 전시회를 가지려는 계획과 3월 말로 30년 끈질기게 근무한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하게 되는 과정이다.
사진전을 열면서 30년 직장생활을 정리해 보려는 의도가 어떻게 남들에게 받아
들여질 지는 모르지만 어떤 결과가 되든, 그간 이런저런 기회로 사진에 담아 두었던 기록을 내다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남들에게 솜씨를 자랑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지만, 오래 전부터 후배들에게 반드시 해야 한다고, 지금부터 해야 한다고 하던 취미생활의 일부를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도 사진전을 여는 이유 중에 하나다.
어쩌면 치졸한듯한 수준의 사진을 거는 것이 남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고, 누구라도 사진은 찍을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도 사진이라는 세계를 가깝게 해 줄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닌가 하는 욕심도 생긴다.
사진전에 걸을 글을 미리 적어보았다. 쑥스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어렴풋이 그려온 은퇴 기념 사진전이 내게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아직 사진을 스캔하며 고르고 있지만 서문을 적었으니 절반은 마친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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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을 열며
어느새 소리 없이 지나가 버린 30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틈틈이 찍어두었던
사진을 모아 사진전을 열게 되었다. 그간 많은 선배, 동료, 후배들과 함께 생활하며 느낀 것은 나는 복 받은 사람이란 것이다. 이제 그 많은 복 중 일부를 사진에 담아 걸 수 있게 되었다.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 준 동료 여러분과 회사의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지나간 삶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숨은 지원자인 아내, 가족, 주위 동료들의 너그러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준 모든 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분야도 아날로그 시대에서 순식간에 디지털 만능세대로 바뀌어 누구나 쉽게 사진을 가까이하는 시절이 왔다. 이런 기회를 통하여 추억거리를 좀더 멋지게 남기는 방법을 소개해 보고 싶었다.
아마추어의 솜씨이기에 부끄러운 수준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를 해 주려니 하는 소박한 마음에 그간 찍었던 수많은 사진 중에서 일부를 골랐다.
사진이라는 세계를 소개하고, 누구나 관심만 있으면 바로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 사진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여겨져, 주변에서 쉽게 만나게 되는 소재를 다양하게 선택해 본 것이다.
사진활동이란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취미임을 공감하고 싶은 것이다.
“정말 오래 근무하셨네요” 하는 것이 요즘 자주 듣게 되는 인사말이다.
법정스님의 글에서 옮겨온 내용으로 답변을 대신하려고 한다.
1959년 티베트에서 중국의 침략을 피해 80이 넘은 노스님이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 왔었다.
그때 기자들이 놀라서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험준한 히말라야를 아무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까?”
그 노스님의 대답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자신의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단다.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걸음 내딛으면서 산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내딛느냐에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을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가?
우리의 삶은 한 걸음씩 어디론지 향해 걷고 있다. 직장 생활 역시 목표를 세우고 한걸음씩, 하루씩 쌓아 가는 것이다. 사진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장 한장 매 순간 집중해서 기록으로 남겨가는 것이 사진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며늘아기가 새로 산 책이 있는데, 읽어 보실만해요
하고 추천을 했었다.
누구나 본인이 조금만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조금씩
나누며, 세상을 훨씬 포근하게 만들 수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정치판과 의학계를 도매금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판의
몇몇 미꾸라지가 흐려 놓은 물을 맑게 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함을 실감하게 된다.
세상에는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이 훨씬 많지만, 그 몇 안 되는
미꾸라지들이 오히려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고 있다.
적어도 박경철이란 의사는 세상을 밝게 하는데 수십명 분의 역할을 소화 해 내고 있는 것 같은데, 본인의 능력을 그렇게 나눌 수 있는 처지가 된 사람들이 부럽기만 하다. 마음만 바꾸면 누구나 변신을 할 수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본인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나눔에 대한 의지가 우선 순위 #1으로 여겨져야 나눔을 실천 할 수 있으니…
“있는 *들이 더해!!” 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럴 때면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 사람들도
그럴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훨씬 여유롭고, 느긋하게 마음 열고 세상을 대하려니 하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내가 아직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아내는 내가 남보다 손재주가 있고, 기계를 다루는 소질이나, 손질하는 순발력이 있다고
“당신은 시골 가서 살게 되면 노인네들 사시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도울 일이 엄청 많을
꺼예요” 한다.
물론 누구나 그럴 기회가 오면 자신의 능력이나 여력을 남과 나누어야 하고, 아무리
세상살이가 어렵더라도 그런 마음가짐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 베푼다는
표현은 본인이 잘나서 그런 처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고, 그냥 나눈다는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고, 순수해 보인다- 나중에 시골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실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다행이겠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후꾸오까 마사노부지음/최성현•조현숙 옮김., 정신세계사 발행>
에서 옮긴 글이다.
모르는 것이 약인가 아닌가, 지혜란 무엇인가,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다. 인터넷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관념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길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
앎은 무용하다.
노인은 인간의 앎을 부정한다. 지혜 또한 미워하고, 아는 것의 무용함을 부르짖는다.
“사람은 춥고 더움을 알고 나서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맛을 알고 나면 맛없음을
한탄하게 되고, 부귀를 알고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또 미추를 알고는 아름다움이나
추함으로 괴로워한다. 아는 것은 근심의 시작이라는 말은 아주 적절하고 귀한 말이다.”
“사람은 추위를 알게 되어 따뜻한 옷을 지어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었고,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구분하기 때문에 점점 부귀해지고, 또 아름답고 추함을 알기 때문에 보다
아름다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열대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추운 곳을 모른다면 더위를 모르게 되고, 한대 사람이
찬바람에 그 몸을 드러내더라도 따뜻한 곳을 모른다면 춥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대 사람은 북쪽에 가서야 비로소 추위를 알고, 한대 사람은 남쪽으로 가서야 따뜻함이
무엇인지를 안다. 열대사람이 마음으로 북쪽을 그리워하면 더위를 느끼게 되고, 한대
사람도 남쪽을 생각하면 그 몸이 추위 때문에 괴로워진다.
그 때문에 남쪽 사람에게 추위를 알게 하고, 북쪽 사람에게 더위를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찬물 속에 들었어도 차갑다는 것을 모르는데, 가령 따뜻한 물속으로 옮겨
따뜻함을 알게 하는 것은 고기에게 무익하고, 유해할 일이다.
시골에 있는 사람은 거친 식사를 해도 그 음식에 맛없다는 것을 모르지만, 한 번 도시에
나가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면 비로소 그 음식이 맛없어진다. 음식물이 거칠더라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충분하다면 억지로 맛있는 것을 알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맛을
알게 된 사람은 더욱더 맛있는 음식을 요구하게 된다. 달콤함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점점 괴로워지게 된다.
가난하더라도 이웃사람이 모두 가난하다면, 그것은 괴롭지 않다. 그러나 만약 이웃에서
웅장한 주택을 지어 올리면, 그 이후부터는 자신의 가난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욱 다투어 웅대한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 그 것은 더 이상 웅대한 저택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다툼과 그에 따르는 괴로움만 있게 되는 것이다.
미추도 마찬가지이다. 누더기가 반드시 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 백 사람의 옷이 추해진다. 한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할 때 백 사람이
추함을 한탄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추움과 더움, 아름다움과 더러움, 맛의 유무 등을 분별하여 아는 데에서
비롯된다. 갓난아기가 아직 맛의 유무를 모르고, 의복의 아름다움과 더러움, 추위와 더위도
모를 때 이것을 갓난아기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이러한 것들에 관하여 식별하게 된다. 그래서 신체에는 언제나 따뜻한 옷,
아름다운 옷을 걸치려 하고, 맛있는 음식과 웅장한 저택을 원하며 얼굴에 치장 따위를 하려
든다. 이렇다고 해서 그들은 과연 어린아이에 비해 행복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따뜻한
옷을 걸치게 되면서 시시각각의 문제에 긍긍하고, 맛있는 것을 알고부터는 부족해 보이는
음식에는 언제나 불만을 품는다. 웅장한 저택에 산다지만 결코 만족해 할 줄 모르고, 또 마음
한구석은 항상 불안하다. 그리하여 점점 초조하고 고뇌에 휩싸여 안색은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간다.
사람들은 이렇게 갖가지 분별로 인해 고민한다. 지혜로 인해 만드는 고민이다. 모르는 쪽이
좋은 것이다.
무지•불식보다 더 낳은 것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현명하게 알면 명백해지고, 어리석고
모르면 미혹되어 불행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는 것이 미혹을 일으키며, 모르면
미혹도 없고 분명해진다. 미혹함이 없다면 행복할 테고, 그러므로 모르는 것이 약 그 자체이다.”
노인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 근심거리라고 말한다. …… 아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불행의 씨앗일까?
+++++++++++++++
에서 옮긴 글이다.
모르는 것이 약인가 아닌가, 지혜란 무엇인가,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다. 인터넷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관념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길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
앎은 무용하다.
노인은 인간의 앎을 부정한다. 지혜 또한 미워하고, 아는 것의 무용함을 부르짖는다.
“사람은 춥고 더움을 알고 나서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맛을 알고 나면 맛없음을
한탄하게 되고, 부귀를 알고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또 미추를 알고는 아름다움이나
추함으로 괴로워한다. 아는 것은 근심의 시작이라는 말은 아주 적절하고 귀한 말이다.”
“사람은 추위를 알게 되어 따뜻한 옷을 지어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었고,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구분하기 때문에 점점 부귀해지고, 또 아름답고 추함을 알기 때문에 보다
아름다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열대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추운 곳을 모른다면 더위를 모르게 되고, 한대 사람이
찬바람에 그 몸을 드러내더라도 따뜻한 곳을 모른다면 춥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대 사람은 북쪽에 가서야 비로소 추위를 알고, 한대 사람은 남쪽으로 가서야 따뜻함이
무엇인지를 안다. 열대사람이 마음으로 북쪽을 그리워하면 더위를 느끼게 되고, 한대
사람도 남쪽을 생각하면 그 몸이 추위 때문에 괴로워진다.
그 때문에 남쪽 사람에게 추위를 알게 하고, 북쪽 사람에게 더위를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찬물 속에 들었어도 차갑다는 것을 모르는데, 가령 따뜻한 물속으로 옮겨
따뜻함을 알게 하는 것은 고기에게 무익하고, 유해할 일이다.
시골에 있는 사람은 거친 식사를 해도 그 음식에 맛없다는 것을 모르지만, 한 번 도시에
나가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면 비로소 그 음식이 맛없어진다. 음식물이 거칠더라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충분하다면 억지로 맛있는 것을 알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맛을
알게 된 사람은 더욱더 맛있는 음식을 요구하게 된다. 달콤함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점점 괴로워지게 된다.
가난하더라도 이웃사람이 모두 가난하다면, 그것은 괴롭지 않다. 그러나 만약 이웃에서
웅장한 주택을 지어 올리면, 그 이후부터는 자신의 가난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욱 다투어 웅대한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 그 것은 더 이상 웅대한 저택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다툼과 그에 따르는 괴로움만 있게 되는 것이다.
미추도 마찬가지이다. 누더기가 반드시 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 백 사람의 옷이 추해진다. 한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할 때 백 사람이
추함을 한탄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추움과 더움, 아름다움과 더러움, 맛의 유무 등을 분별하여 아는 데에서
비롯된다. 갓난아기가 아직 맛의 유무를 모르고, 의복의 아름다움과 더러움, 추위와 더위도
모를 때 이것을 갓난아기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이러한 것들에 관하여 식별하게 된다. 그래서 신체에는 언제나 따뜻한 옷,
아름다운 옷을 걸치려 하고, 맛있는 음식과 웅장한 저택을 원하며 얼굴에 치장 따위를 하려
든다. 이렇다고 해서 그들은 과연 어린아이에 비해 행복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따뜻한
옷을 걸치게 되면서 시시각각의 문제에 긍긍하고, 맛있는 것을 알고부터는 부족해 보이는
음식에는 언제나 불만을 품는다. 웅장한 저택에 산다지만 결코 만족해 할 줄 모르고, 또 마음
한구석은 항상 불안하다. 그리하여 점점 초조하고 고뇌에 휩싸여 안색은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간다.
사람들은 이렇게 갖가지 분별로 인해 고민한다. 지혜로 인해 만드는 고민이다. 모르는 쪽이
좋은 것이다.
무지•불식보다 더 낳은 것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현명하게 알면 명백해지고, 어리석고
모르면 미혹되어 불행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는 것이 미혹을 일으키며, 모르면
미혹도 없고 분명해진다. 미혹함이 없다면 행복할 테고, 그러므로 모르는 것이 약 그 자체이다.”
노인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 근심거리라고 말한다. …… 아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불행의 씨앗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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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께서 글은 자신의 삶 속에서 써야 한다고 강조 하셨는데, 우연히 같은 내용을 아버지 라는 잡지에서 보게 되어 반성하는 의미에서 옮겨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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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시를 써라.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시인을 취재/정리한 송현영님의 글임.)
천상 농부였던 아버지
아버지(김규팔 옹)는 평생 농부의 삶을 살다 가셨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부지런히 논이나 들에 나가 일하시던 땅 욕심이 아주 많은 전형적인 농부였다. 자식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도 논이나 볕에서 일하며 풀어버리시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식들에게는 묵묵했다.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서른 중반까지 노총각으로 지낸, 혼기를 놓친 큰아들이 걱정스러우셔도 한 번도 입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으셨다.
17세에 아버지에게 시집 온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 한 분만 보고 사셨다. 명랑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아버지 한 분만 바라 보셨고 아버지에게는 늘 지극정성이셨다.
내가 나고 자란 진메 마을 은 동네사람 누구나 가족같이 지내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작은 마을에서 동네 처녀와 로맨스를 만들었다. 어머님이 이 사실을 알고 많이 화를 내고 싸우셨던 것 같은데 내 기억엔 없다. 자식들에게 안 보이려고 들에 나가 같이 일하면서 싸우셨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아내가 어머님과 아버님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지금도 말이 없이 무뚝뚝했던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그 시대 아버지들이 모두 그랬고 아버지 역시 자식들에게 과묵했다. 다만 아버지는 늘 이른 아침에 논이나 들로 나가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만 보여 주셨다.
초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였나 보다. 버스가 없던 시절이라 아버지와 난 20리 길을 걸어 강진에서 열리는 장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 데 아버지가 큰 기와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셨다. 번듯하게 올려진 검은 기와지붕과 추녀, 대문을 보시면서 “용태아 나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 아버지 얼굴에는 평소에 과묵한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던 부러움이, 부지런히 일만하는 아버지가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바람들이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에게도 부러움이 있구나!’ 그 모습이 무척 또렷했다.
훌 4남2녀의 맏이였던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도와서 들이나 밭에 나가 일을 했다. 어린 동생들의 뒤치다꺼리는 늘 맏이인 내 몫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논에서 쟁기를 만지거나 볕에서 호미질을 하거나 했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잔소리 하신 적이 없었지만 호미나 낫을 어떻게 잡는지 자분자분 가르쳐 준 적도 없었다. 내가다 알아서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뽑는 임용고시에 합격해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당시 모자라는 교원을 충당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고교 졸업자도 응시할 수 있도록 했는데, 시험에 합격했다고 좋아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내색도 안 하시고 말씀은 안 하셨지만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고달픈 농부의 삶을 물려받지 않아도 된다고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생전에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셨고,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가치있는 삶에 대한 깨달음
아버지는 평생 일만 하셨지만 참 행복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간이 안 좋으셔서 돌아가시기 몇 년은 병마에 시달리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병구완하는데 지극정성을 다하셨다. 진심으로 사랑한 지아비에 대한 섬김이었고,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예의를 다했다. 병에 좋다는 다슬기, 굴미나리, 간에 좋다는 약초들을 대며 돌아가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보살폈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한 남자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참가치 있는 삶을 사신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어머니에게 남긴 말들이 있다. “임자 나 허고 사느라 애썼네 잉. 사는 것이 참 금방이네. 산다는 것이 바람같은 것이여.”
아버지의 이 세 마디 말 속에 많은 의미가 있었다. 늘 땅 욕심, 일 욕심이 많아 농사만 지었던 아버지의 삶이 아쉬웠지만,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게 못다 해주었던 지아비의 정이 미안하고 감사했나 보다. 어머니께서 실수로 아버지가 아끼시던 나무 가지에 상처를 내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역정을 내셨는데 당신이 모질게 대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못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단 세마디 말속에 녹아 있었다.
두 분은 금슬이 참 좋았는데 어머니가 더 많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따랐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왜 그렇게 아버지가 좋았냐고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이유를 모르고 좋아해야 평생 좋아할 수 있는데 이유를 알고 좋아하면 그 조건이 사라질 때 감정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유없이 사랑해야 평생을 간다는 게 어머니의 말씀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남편이었다. 우리에겐 무뚝뚝해도 어머니에겐 살갑게 이야기도 하시고 우스갯소리도 잘하셔서 힘든 밭일을 하시면서도 늘 웃으며 일했다고 기억하시니 말이다. 난 아버지의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인정받은 지아비였고, 아버지가 말없이 가르쳐 준 삶의 태도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땅에 성실하게 임했던 모습들이 자식인 나에게 그대로 체득되었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건 출세하고 부를 누리고 삶이 풍요로워야 하는 것을 떠나 자신이 처해 있는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자기의 것으로 끌어안고 보듬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어려움들을 만났을 때 못난 사람은 비켜 가고 잘난 사람들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있다.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만났을 때, 무거운 짐을 나눠 가질 부부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버지처럼 나는 그런 점에서 참 행복하다.
꽃보다 예쁜 아내
내 아내는 셋째 동생의 친구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왔었다. 아내는 처음 날 봤을 때부터 이유 없이 그냥 내가 좋았고 나에게 시집 오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니 처가에서는 열네 살이나 나이 많은 가난한 노총각에게 시집가겠다는 딸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도망치다시피 나와서 나와 결혼했고 20여 년 동안 한결같이 내게 좋은 아내로 최선을 다해주었다. 어느 날 꽃구경을 가서 아내가 나를 보며 "여보 여보, 꽃이 예뻐? 내가 예뻐?"하고 물었다.
"아이고 이 꽃이 암만 예뻐도 당신만큼 예쁜 꽃은 못 봤네. 당연히 당신이 더 예쁘지"
우리 부부가 이렇게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다른 부부들은 무척 놀렸지만 난 진짜다.
아내가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세상이 예쁘고 세상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사소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의 일상을 존중해야 시를 쓸 마음이 생긴다.
시와 삶은 분리될 수 없다. 삶의 실천이 시에 녹아 있어야 진짜라고 생각한다. 시는 삶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쩌면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아내에게 믿음을 얻는 시인이 진짜시인이다. 작은 것이라도 소중한 일상의 세세함이 녹아든 삶은 중요하다. 난 아내와 함께 나누는 일상의 작은 것들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자꾸 이야기 하다보니 시가 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참 빛나는 삶을 살았다. 시를 통해 나름대로 이 세계를 이해했고 모름지기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었기에,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기에 과분하다.
농사일을 하며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나 시를 통해 작은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나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아들인 민세가 “아버지의 시를 통해 시골마을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라고 말해주었을 땐 뭉클했다. 나를 보고 ‘귀여운 아버지’ 라고 불러주던 아들은 자기 소신대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난 내 아들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힘이 들더라도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기를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간 아들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신뢰감을 준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아내와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아이들에게 건강한 가치관을 심어 준 것 같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만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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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시를 써라.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시인을 취재/정리한 송현영님의 글임.)
천상 농부였던 아버지
아버지(김규팔 옹)는 평생 농부의 삶을 살다 가셨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부지런히 논이나 들에 나가 일하시던 땅 욕심이 아주 많은 전형적인 농부였다. 자식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도 논이나 볕에서 일하며 풀어버리시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식들에게는 묵묵했다.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서른 중반까지 노총각으로 지낸, 혼기를 놓친 큰아들이 걱정스러우셔도 한 번도 입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으셨다.
17세에 아버지에게 시집 온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 한 분만 보고 사셨다. 명랑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아버지 한 분만 바라 보셨고 아버지에게는 늘 지극정성이셨다.
내가 나고 자란 진메 마을 은 동네사람 누구나 가족같이 지내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작은 마을에서 동네 처녀와 로맨스를 만들었다. 어머님이 이 사실을 알고 많이 화를 내고 싸우셨던 것 같은데 내 기억엔 없다. 자식들에게 안 보이려고 들에 나가 같이 일하면서 싸우셨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아내가 어머님과 아버님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지금도 말이 없이 무뚝뚝했던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그 시대 아버지들이 모두 그랬고 아버지 역시 자식들에게 과묵했다. 다만 아버지는 늘 이른 아침에 논이나 들로 나가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만 보여 주셨다.
초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였나 보다. 버스가 없던 시절이라 아버지와 난 20리 길을 걸어 강진에서 열리는 장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 데 아버지가 큰 기와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셨다. 번듯하게 올려진 검은 기와지붕과 추녀, 대문을 보시면서 “용태아 나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 아버지 얼굴에는 평소에 과묵한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던 부러움이, 부지런히 일만하는 아버지가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바람들이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에게도 부러움이 있구나!’ 그 모습이 무척 또렷했다.
훌 4남2녀의 맏이였던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도와서 들이나 밭에 나가 일을 했다. 어린 동생들의 뒤치다꺼리는 늘 맏이인 내 몫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논에서 쟁기를 만지거나 볕에서 호미질을 하거나 했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잔소리 하신 적이 없었지만 호미나 낫을 어떻게 잡는지 자분자분 가르쳐 준 적도 없었다. 내가다 알아서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뽑는 임용고시에 합격해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당시 모자라는 교원을 충당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고교 졸업자도 응시할 수 있도록 했는데, 시험에 합격했다고 좋아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내색도 안 하시고 말씀은 안 하셨지만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고달픈 농부의 삶을 물려받지 않아도 된다고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생전에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셨고,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가치있는 삶에 대한 깨달음
아버지는 평생 일만 하셨지만 참 행복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간이 안 좋으셔서 돌아가시기 몇 년은 병마에 시달리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병구완하는데 지극정성을 다하셨다. 진심으로 사랑한 지아비에 대한 섬김이었고,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예의를 다했다. 병에 좋다는 다슬기, 굴미나리, 간에 좋다는 약초들을 대며 돌아가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보살폈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한 남자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참가치 있는 삶을 사신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어머니에게 남긴 말들이 있다. “임자 나 허고 사느라 애썼네 잉. 사는 것이 참 금방이네. 산다는 것이 바람같은 것이여.”
아버지의 이 세 마디 말 속에 많은 의미가 있었다. 늘 땅 욕심, 일 욕심이 많아 농사만 지었던 아버지의 삶이 아쉬웠지만,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게 못다 해주었던 지아비의 정이 미안하고 감사했나 보다. 어머니께서 실수로 아버지가 아끼시던 나무 가지에 상처를 내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역정을 내셨는데 당신이 모질게 대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못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단 세마디 말속에 녹아 있었다.
두 분은 금슬이 참 좋았는데 어머니가 더 많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따랐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왜 그렇게 아버지가 좋았냐고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이유를 모르고 좋아해야 평생 좋아할 수 있는데 이유를 알고 좋아하면 그 조건이 사라질 때 감정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유없이 사랑해야 평생을 간다는 게 어머니의 말씀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남편이었다. 우리에겐 무뚝뚝해도 어머니에겐 살갑게 이야기도 하시고 우스갯소리도 잘하셔서 힘든 밭일을 하시면서도 늘 웃으며 일했다고 기억하시니 말이다. 난 아버지의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인정받은 지아비였고, 아버지가 말없이 가르쳐 준 삶의 태도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땅에 성실하게 임했던 모습들이 자식인 나에게 그대로 체득되었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건 출세하고 부를 누리고 삶이 풍요로워야 하는 것을 떠나 자신이 처해 있는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자기의 것으로 끌어안고 보듬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어려움들을 만났을 때 못난 사람은 비켜 가고 잘난 사람들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있다.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만났을 때, 무거운 짐을 나눠 가질 부부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버지처럼 나는 그런 점에서 참 행복하다.
꽃보다 예쁜 아내
내 아내는 셋째 동생의 친구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왔었다. 아내는 처음 날 봤을 때부터 이유 없이 그냥 내가 좋았고 나에게 시집 오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니 처가에서는 열네 살이나 나이 많은 가난한 노총각에게 시집가겠다는 딸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도망치다시피 나와서 나와 결혼했고 20여 년 동안 한결같이 내게 좋은 아내로 최선을 다해주었다. 어느 날 꽃구경을 가서 아내가 나를 보며 "여보 여보, 꽃이 예뻐? 내가 예뻐?"하고 물었다.
"아이고 이 꽃이 암만 예뻐도 당신만큼 예쁜 꽃은 못 봤네. 당연히 당신이 더 예쁘지"
우리 부부가 이렇게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다른 부부들은 무척 놀렸지만 난 진짜다.
아내가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세상이 예쁘고 세상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사소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의 일상을 존중해야 시를 쓸 마음이 생긴다.
시와 삶은 분리될 수 없다. 삶의 실천이 시에 녹아 있어야 진짜라고 생각한다. 시는 삶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쩌면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아내에게 믿음을 얻는 시인이 진짜시인이다. 작은 것이라도 소중한 일상의 세세함이 녹아든 삶은 중요하다. 난 아내와 함께 나누는 일상의 작은 것들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자꾸 이야기 하다보니 시가 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참 빛나는 삶을 살았다. 시를 통해 나름대로 이 세계를 이해했고 모름지기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었기에,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기에 과분하다.
농사일을 하며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나 시를 통해 작은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나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아들인 민세가 “아버지의 시를 통해 시골마을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라고 말해주었을 땐 뭉클했다. 나를 보고 ‘귀여운 아버지’ 라고 불러주던 아들은 자기 소신대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난 내 아들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힘이 들더라도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기를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간 아들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신뢰감을 준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아내와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아이들에게 건강한 가치관을 심어 준 것 같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만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오랜만에 다시 들러 본 일본은 방송 매체를 통해 듣던 것과 비교하면 아직 씽씽한 나라였다.
신호를 자율적으로 지키는 듯한 도로의 질서, 택시 운전사들의 자부심, 직업의식, 차량보다는 사람을 우선으로 운영되는 시내 도로의 모습에서 우리가 언제나 쫓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택시는 우리 나라 큰 회사 사장님들의 차 만큼이나 깨끗하고, 새차처럼 번쩍였고, 조심스럽고, 유유하게 운전하는 모습은 과거 개인 택시 운전사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차를 몰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였다.
시간 병산 요금 제도에 대기시간이나 운행시간에 대한 비중이 훨씬 크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 그런 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우리 나라의 교통 질서는 그토록 권장하는 대중교통 수단이 교통질서를 어지럽히는 장본인이라고 생각을 해 왔는데, 일본의 교통질서는 오히려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인 시내버스부터 모든 면에서 앞장을 서고있었다.
교토에는 교통량이 그리 많지 않아 그렇게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차선과 4차선을 종횡무진으로 오가며 과속을 당연히 여기는 듯 달리고 있는 우리 나라의 시내버스와는 너무도 대조가 되었다.
잔돈을 거스르느라 시간을 끈다고 어느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기사부터 여유있게 기다려 주는 너그러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기본요금이 200엔 정도인 교토에서 일일 자유권이 500엔이라면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너무도 싸다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놓고 몇번이고 갈아탈 수 있으니 편하기 이를데 없었다.
우리는 왜 일본처럼 교통질서가 유지되지 못할까? 10년 이상 뒤떨어진 것 같다.
신호를 자율적으로 지키는 듯한 도로의 질서, 택시 운전사들의 자부심, 직업의식, 차량보다는 사람을 우선으로 운영되는 시내 도로의 모습에서 우리가 언제나 쫓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택시는 우리 나라 큰 회사 사장님들의 차 만큼이나 깨끗하고, 새차처럼 번쩍였고, 조심스럽고, 유유하게 운전하는 모습은 과거 개인 택시 운전사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차를 몰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였다.
시간 병산 요금 제도에 대기시간이나 운행시간에 대한 비중이 훨씬 크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 그런 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우리 나라의 교통 질서는 그토록 권장하는 대중교통 수단이 교통질서를 어지럽히는 장본인이라고 생각을 해 왔는데, 일본의 교통질서는 오히려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인 시내버스부터 모든 면에서 앞장을 서고있었다.
교토에는 교통량이 그리 많지 않아 그렇게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차선과 4차선을 종횡무진으로 오가며 과속을 당연히 여기는 듯 달리고 있는 우리 나라의 시내버스와는 너무도 대조가 되었다.
잔돈을 거스르느라 시간을 끈다고 어느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기사부터 여유있게 기다려 주는 너그러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기본요금이 200엔 정도인 교토에서 일일 자유권이 500엔이라면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너무도 싸다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놓고 몇번이고 갈아탈 수 있으니 편하기 이를데 없었다.
우리는 왜 일본처럼 교통질서가 유지되지 못할까? 10년 이상 뒤떨어진 것 같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가장 놀라운 배움 중 하나는 삶은 불치병을 진단 받는 순간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당신은 죽음의 실체를 인정하는 순간, 삶이라는 실체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고, 지금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고, 자신에게 있는 것은 지금의 이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모든 날들을 최대한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아침의 냄새를 맡아 본 것은 언제였습니까? 아기의 머리를 만져 본 것은? 정말로 음식을 맛보고 즐긴 것은? 맨발로 풀밭을 걸어 본 것은? 파란 하늘을 본 것은 또 언제였습니까?
이것은 다시 얻지 못할지도 모르는 경험들입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한 번만 더 별을 보고 싶다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언제나 정신이 번쩍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까이 살지만 바다를 볼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별 아래에 살지만, 가끔이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나요?
삶을 진정으로 만지고 맛보고 있나요? 평범한 것 속에서 특별한 것을 보고 느끼나요?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신은 세상을 존속시키기로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눈을 뜨는 매일 아침, 당신은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하루를 선물 받은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그 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았나요?
이번 생과 같은 생을 또 얻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이 생에서처럼, 이런 방식으로 이런 환경에서, 이런 부모, 아이들, 가족과 또다시 세상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결코 다시 이런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는 이번 생처럼 경이로움을 지닌 대지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들을 보러 가십시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아침의 냄새를 맡아 본 것은 언제였습니까? 아기의 머리를 만져 본 것은? 정말로 음식을 맛보고 즐긴 것은? 맨발로 풀밭을 걸어 본 것은? 파란 하늘을 본 것은 또 언제였습니까?
이것은 다시 얻지 못할지도 모르는 경험들입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한 번만 더 별을 보고 싶다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언제나 정신이 번쩍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까이 살지만 바다를 볼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별 아래에 살지만, 가끔이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나요?
삶을 진정으로 만지고 맛보고 있나요? 평범한 것 속에서 특별한 것을 보고 느끼나요?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신은 세상을 존속시키기로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눈을 뜨는 매일 아침, 당신은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하루를 선물 받은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그 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았나요?
이번 생과 같은 생을 또 얻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이 생에서처럼, 이런 방식으로 이런 환경에서, 이런 부모, 아이들, 가족과 또다시 세상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결코 다시 이런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는 이번 생처럼 경이로움을 지닌 대지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들을 보러 가십시오.

글을 보면 나처럼 동양적인 생각을 하고있는 사람이
서양에도 있음을 확인하게 되어 정말 반갑다.
오지 않은 내일을 두려워하거나 마음대로 상상할
필요는 없지만, 오늘 현재에 몰입하며 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일부 종교인들은 오지 않은 미래를 그럴듯하게
그려 보이며 신도들을 미래에 대한 포로를 만들어
종교에 가두어 두려 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런
분위기에 동조하며 기대고 싶지 않다.
죽음이 코앞에 닥쳐 왔다거나 마지막 날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기에 모든 사람들이 내일을 기대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내일 어찌 되던 지금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내게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므로... 지금 이순간은
내게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므로....
************************
어제의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크나큰 자유가 있습니다. 그때 더 이상
과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샤워를 하며 어제의 때를 씻어 내지만, 어제 느낀 감정의 찌꺼기는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상대방과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살지 않으면, 행복을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의 문을 닫지 말고 가끔씩 그 문을 들여다보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잭은 언제나 이 순간을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몇몇 마라톤 경기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는
그는 늘 현재에 충실합니다. 방 안으로 들어설 때면 그는 이미 수천 번은 와 본 곳인데도
매번 처음 온 것처럼 주위를 둘러봅니다. 누군가를 만나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을 때도
언제나 진심을 담습니다.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눌 때면 진정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습니다. 눈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는 점심 식사
메뉴라든가 그날 저녁의 모임, 혹은 이메일에 답장을 뭐라고 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잭은 언제나 그 순간 속에, 그 자리에 있습니다.
불행히도 잭은 약성 림프 종양에 걸렸는데 병은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두 다리가 부어 올랐고, 그의 몸에서 가장 먼저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순간에 충실 하는 그의 삶의 방식은 병이 깊어지면서 더 두드러졌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몸이 어떤지 물으면, 그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 상태를 꼼꼼히
돌아봅니다. 마찬가지로 남의 안부를 물을 때에도 자신의 진심을 담아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진심으로 그와 연결된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현재의 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완벽한 모델입니다.
먼 과거에 매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일단 상대방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신이 한 말은
완전히 잊습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만듭니다.
아무도 “잘 지내요?” 나 “별 일 없어?” 와 같은 그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싶게끔 만들며, 그의 질문에는 진심을 담아 답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한 순간도, 그 어떤 것도 놓치려 하지 않습니다. 잭의 인생에는 가을이 오지 않으며,
언제나 여름날로 가득합니다. 봄의 희망에 마음을 빼앗긴 채 겨울을 지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삶의 모든 계절에서 늘 현재에 충실합니다.
잭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나면 당신의 현재가 얼마나 과거와 미래에 의해 강탈당하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보내 버리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삶에 얼마나 멋진
경험들을 안겨 주는지 모릅니다.
애인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내일 아침 수업 따위는 잊고 대화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수업 준비를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애인과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강의도 더 잘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에 한가지 일만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느샌가 미래에 의존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미래만 바라보며 살고,
또 어떤 이는 미래를 꿈꾸며, 또 다른 이는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이 모든 접근은 현재를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어느 날 밤, 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게 된 50대의 한 남자가 잠을 자다가 두려움에 떨며
깨어났습니다. 수첩을 펼쳐 보니, 앞으로 몇 주 동안 어떤 일정도 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미래는 말 그대로 텅 비어 보였습니다.
그는 이 병을 헤쳐 나가려면 과거도 잊고 미래도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렇게 미친 듯이 수첩을 펼쳐 보고 나서야 비로소 미래를 잊어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실의 경험을 통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시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시간의 개념이
무너지는 현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 언제 방문해야 좋을지 물으면 그는 언제든 상관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시간이 흔들리더라도, 그리고 전처럼 자신이 시간을 채우기 위해 애쓰지
않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껴 갔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더욱
깊어지자, 그는 시간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설명했습니다.
“인위적인 시간들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내가 시간 속에서 살아왔고 시간 속에서 죽게
되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본래 영원하며, 시간을 초월해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는 실제로 시간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확신할 수 없으며, 그것이 시간의 실체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일어났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말할 필요 없이 미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사실상 우리는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대개 과거란 현재 이전의 시간이며 미래는 앞에 놓인 시간이라 고 여기지만, 이것은 시간이
일직선으로 된 연속선상에 놓여 있음을 전제로 한 가정입니다.
과학자들은 시간이 일직선이 아니며,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라는 단단한 형태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면 과거, 현재,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만일 시간이 직선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에
동시에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