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서 소근소근/비처럼 음악처럼'에 해당되는 글 121건
- 2006.02.14 서울대학병원을 오랫만에 들러 보니...
- 2006.02.10 스캐너가 들려주는 옛 이야기
- 2006.02.01 인천공항에서 만난 인도 출신 장난꾸러기
- 2006.01.31 비올라 연주회에서
- 2006.01.27 장난감을 들여 놓으니..
- 2006.01.25 남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나?
- 2006.01.20 리움의 목요음악회, "박인수교수와 제자들"을 보고
- 2006.01.18 미국 서부 고속도로의 풍경
- 2006.01.17 여행일정을 정리해 보니... 2
- 2006.01.13 여행에서 얻은 것 ?
서울대학병원의 자리가 과거 창경궁의 부속건물인 함춘원 터였다는 것을 어제 처음 알았다.
병원 안에는 큰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어제 유심히 보니 그 나이가 만만치 않겠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조가 심었던 나무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인지는 모르나, 요즘은 오래된 큰 나무가 지난 세월 모두 지켜보고 묵묵히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전에 없이 경건해 짐을 느낀다.
사람의 일생은 몇 백년씩 묵은 느티나무와 비교한다면 하룻강아지 격이다.
금년 초에 킹스 캐니언에서 만났던 General Sherman 이라 이름을 붙이고 직경이 11미터니 어쩌니 하며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그들이 우기고 있는 나무 앞에서는 그 규모와 의연함에 할말을 잊었었다.
세계 제일이던 아니던, 그 기나긴 세월을 살아왔고, 앞으로 언제까지 살게 될지도 모르는 그 큰 나무와 나를 비교해보니 웬지 더욱 왜소해 짐을 어쩔 수 없었다.
시골을 가면 어느 마을에나 입구에 마을 주민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커다란 느티나무가 당산목으로 자리를 잡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 나무의 위치란 단순히 오래된 큰 나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마을 사람들에게 주고있다.
여행 중 그런 나무는 수없이 만났지만, 그때 마다 느낀 것은 역시 그 나무들의 자태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나오는 늠름함, 여유로움이었다. 누구나 그런 나무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자연에 비하여 미미한 존재이며, 사람 역시 자연의 한 부분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압도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최근에는 인간이 이런저런 개발을 앞세워 무분별하게 환경을 너무 파괴하고, 마구 파헤치며 자연을 망가뜨린 결과가 폭설, 폭우, 해일 같은 재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있다.
인간은 자연의 극히 일부분임을 모두가 깨닫고 겸손해 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병원 안에는 큰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어제 유심히 보니 그 나이가 만만치 않겠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조가 심었던 나무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인지는 모르나, 요즘은 오래된 큰 나무가 지난 세월 모두 지켜보고 묵묵히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전에 없이 경건해 짐을 느낀다.
사람의 일생은 몇 백년씩 묵은 느티나무와 비교한다면 하룻강아지 격이다.

세계 제일이던 아니던, 그 기나긴 세월을 살아왔고, 앞으로 언제까지 살게 될지도 모르는 그 큰 나무와 나를 비교해보니 웬지 더욱 왜소해 짐을 어쩔 수 없었다.
시골을 가면 어느 마을에나 입구에 마을 주민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커다란 느티나무가 당산목으로 자리를 잡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 나무의 위치란 단순히 오래된 큰 나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마을 사람들에게 주고있다.
여행 중 그런 나무는 수없이 만났지만, 그때 마다 느낀 것은 역시 그 나무들의 자태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나오는 늠름함, 여유로움이었다. 누구나 그런 나무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자연에 비하여 미미한 존재이며, 사람 역시 자연의 한 부분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압도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최근에는 인간이 이런저런 개발을 앞세워 무분별하게 환경을 너무 파괴하고, 마구 파헤치며 자연을 망가뜨린 결과가 폭설, 폭우, 해일 같은 재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있다.
인간은 자연의 극히 일부분임을 모두가 깨닫고 겸손해 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나이가 들 수록 가는 세월의 속도는 빨라진다고 하는데, 새해 들어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묵은 필름을 스캐닝하면서, 지나온 시절을 되돌리기엔 역시 사진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찍었기에 장면마다 대부분 기억이 되살아 나기도 하고, 작은 사진으로 보던 것을 모니터로 확대해서 밝게 보니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오래전 사진은 어느 집이나 그렇듯이 애들이 주된 모델이고, 백일, 돐, 유치원, 초등학교 행사에 참석해서 남긴 기록이 대부분이다. 사진으로 보관하고 있던 것은 색이 많이 바랬고, 또 사진이라는 작은 틀에 담겨있기에 요즘 많이 쓰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모니터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 낡은 필름도 스캐너에 부속된 소프트웨어가 싱싱한 사진으로 되살려 모니터에 올려 주니 훨씬 실감이 나게 된다.
어젠 감기의 습격 덕분(?)에 출근을 안하고 종일 방에 갇혀서, 더부룩한 장발머리로 애들하고 찍었던 사진을 뒤적여 보며 스캐너가 들려 주는 옛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감기에 점령 당해 몸은 괴로웠지만, 마음은 잠시나마 아주 젊어질 수 있었다. 우리 몸과 마음도 필름처럼 시간을 정지시켜 잡아 두는 비법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는 묘약을 기대하고, 어른들은 젊음을 붙잡아 머물고 싶어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점점 빠르게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이렇게 살다가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말 것만 같은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이 사진 속의 단풍 잎처럼 사그라질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으니 아직 마음만은 청춘인가 보다.
묵은 필름을 스캐닝하면서, 지나온 시절을 되돌리기엔 역시 사진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찍었기에 장면마다 대부분 기억이 되살아 나기도 하고, 작은 사진으로 보던 것을 모니터로 확대해서 밝게 보니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오래전 사진은 어느 집이나 그렇듯이 애들이 주된 모델이고, 백일, 돐, 유치원, 초등학교 행사에 참석해서 남긴 기록이 대부분이다. 사진으로 보관하고 있던 것은 색이 많이 바랬고, 또 사진이라는 작은 틀에 담겨있기에 요즘 많이 쓰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모니터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 낡은 필름도 스캐너에 부속된 소프트웨어가 싱싱한 사진으로 되살려 모니터에 올려 주니 훨씬 실감이 나게 된다.
어젠 감기의 습격 덕분(?)에 출근을 안하고 종일 방에 갇혀서, 더부룩한 장발머리로 애들하고 찍었던 사진을 뒤적여 보며 스캐너가 들려 주는 옛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는 묘약을 기대하고, 어른들은 젊음을 붙잡아 머물고 싶어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점점 빠르게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이렇게 살다가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말 것만 같은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이 사진 속의 단풍 잎처럼 사그라질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으니 아직 마음만은 청춘인가 보다.

D-200 구입 후 처음으로 찍은 외국인이 바로 인천공항에서 만나 샌프란시스코까지 동행했던 이 어린 인도 녀석이다.
입가에 뭔가를 뭍치고, 탑승구 주변을 사정없이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던 녀석인데, 인도는 생활 환경이 열악해서인지,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몰라도, 카스트제도에서 높은 계급에 속해 먹고 살만한 출신은 너나 할 것없이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외국을 드나들고 있으니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상으로 최소한의 지위는 확보한 복받은 녀석일꺼다. 머지 않아 외국 어디에서 살게 될테니..
우리 나라의 젊은층 역시 외국에서 살고 싶어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은데, 외국이란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몰라도 아주 눌러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해본적이 없다.
TV 프로에 최근 필리핀에서 퇴직 연금으로 생활하는 예비역군출신 부부가 화제였다고 하지만, 열대기후 더운 곳 빼고, 너무 추운 곳 피하고 생활비가 적게 들만한 지역은 여기라 할만한 곳이 아직 떠오르지 않으니 그저 죽으나 사나 사계절 분명하고, 산수 좋고 아직 볼거리가 수없이 남아있는 대~~한민국에서 사는 수 밖에...
지난주 26일에는 로댕 갤러리 김상진 비올라 연주회에 아내랑 함께 갔다. 비올라는 독주용 악기라기보다는 협주용 악기라고만 생각을 해 왔는데, 비올리스트+피아니스트 부부의 열정이 녹아있어서인지 첼로같은 느긋한 저음은 부족해도, 바이올린 같은 산뜻하고 가끔은 날카롭기도 한 음색은 없어도, 듣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튀지 않는 아주 포근하고도 다정한 정감을 느끼게 해 주는 음색을 맘껏 즐겼다.
한동안 게리 카아가 연주하는 더블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무한한 깊이의 저음에 빠져 있던 적이 있었는데, 실황이어서인지 비올라 연주 역시 나름 대로 특색이 있어서, 자주 들을 수 있으면 하는 아쉬움 속에 연주회를 빠져 나왔다.
로댕 갤러리는 연주회를 겨냥해서 지은 건물이 아니다 보니 여러 가지 아쉬움이 뒤따르기도 했다. 온통 유리로 둘러싸인 건물에 맨질 맨질 매끈한 돌로 붙인 바닥 때문인지 마구 흩어지기만 하는 악기소리, 연주 중 마구 돌아다니는 젊은 언니들의 달그락 거리는 구둣발 소리, 간이의자를 들고 자리잡으려 서성이는 어수선함, 어디선지 환기장치가 돌아가는 소리, 한 곡이 끝날 적마다 박수소리 사이로 들리는 조잘 조잘대는 잡담소리, 연주 중에도 마구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휴대폰 전화기 소리, 휴대폰 카메라로 뭔가를 남기려고 들이대며 찍어대는 모습, 어린아기의 울음소리까지... 시장터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분위기에서 듣는 비올라 연주회... 여건은 너무나 나빴지만, 부부 연주가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많은 것을 덮어 주었다.
2 주일 동안 2번의 연주회를 아내랑 돌아 보며 행복에 겨워서였을까, 문득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이런 아름다운 연주회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가 진행하던 연주회에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뜨게 된다면, 그 연주가도 다시는 같은 분위기의 연주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내와 함께 간 음악회라서인지, 부부가 함께이끄는 연주라서인지 비올라의 따스한 음색을 더욱 가슴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게리 카아가 연주하는 더블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무한한 깊이의 저음에 빠져 있던 적이 있었는데, 실황이어서인지 비올라 연주 역시 나름 대로 특색이 있어서, 자주 들을 수 있으면 하는 아쉬움 속에 연주회를 빠져 나왔다.
로댕 갤러리는 연주회를 겨냥해서 지은 건물이 아니다 보니 여러 가지 아쉬움이 뒤따르기도 했다. 온통 유리로 둘러싸인 건물에 맨질 맨질 매끈한 돌로 붙인 바닥 때문인지 마구 흩어지기만 하는 악기소리, 연주 중 마구 돌아다니는 젊은 언니들의 달그락 거리는 구둣발 소리, 간이의자를 들고 자리잡으려 서성이는 어수선함, 어디선지 환기장치가 돌아가는 소리, 한 곡이 끝날 적마다 박수소리 사이로 들리는 조잘 조잘대는 잡담소리, 연주 중에도 마구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휴대폰 전화기 소리, 휴대폰 카메라로 뭔가를 남기려고 들이대며 찍어대는 모습, 어린아기의 울음소리까지... 시장터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분위기에서 듣는 비올라 연주회... 여건은 너무나 나빴지만, 부부 연주가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많은 것을 덮어 주었다.
2 주일 동안 2번의 연주회를 아내랑 돌아 보며 행복에 겨워서였을까, 문득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이런 아름다운 연주회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가 진행하던 연주회에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뜨게 된다면, 그 연주가도 다시는 같은 분위기의 연주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내와 함께 간 음악회라서인지, 부부가 함께이끄는 연주라서인지 비올라의 따스한 음색을 더욱 가슴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15~20년 전 세월을 보낸 낡은 필름도 디지털 기술로 눈가림을 해 주어 엊그제 찍은 듯한 색감을 놀라울 수준으로 되살려 내니 참 좋은 세상이다.
사진은 정말 다양한 기능을 감추고 있다. 한 가족이 살아온 이야기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가, PC 모니터에 생생한 느낌으로 살려내고, 아득히 잊었던 시절로 잠시나마 되 돌려주니 반갑기도 하고, 지난 세월을 조용히 반성도 하게 해주니 고맙기도 하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모니터로 보는 것과는 느낌에 차이가 많다. 빛을 내는 모니터가 훨씬 생동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간 찍어 둔 필름이 만만치 않게 많이 있어 당분간 어른이(?) 장난감으로는 Very Good인 것으로 보인다.
아내는 머지않아 겨울방학이 끝나 다시 학교로 내려가고, 나는 다시 작은 녀석과 둘이서 지내게 되더라도 시간죽이기를 할 수 있는 훌륭한 친구 겸 장난감을 내 곁에 마련해 두었다고 안심하는 눈치다. 하지만, 홀로 객지에서 지내게 아내를 내쫓는 듯한 답답한 마음을 감싸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저 스캔한 낡은 필름이 잊었던 소중한 추억을 되찾아주고 오랫동안 잊었던 이야기를 아내와 나눌수 있는 불쏘시기가 되어 주기만을 기대할 따름이다.
정년퇴직이 다가오니 퇴직 후 뭘 해야 할 것인가를 조금씩 생각하게 된다.
한동안은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한국사람들에 대해 왜일까 하고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대기업의 임원으로 직장 생활을 마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이하의 수준이라고 인정을 받는 직업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직업으로 변신해서 방송이나 잡지에 이름이 오르는 경우도 간혹 볼 수 있고, 또 화제거리가 되고있으니, 아직 그런 면에서 보면 꽤나 폐쇄적인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는데, 오래 미국에서 살다가 지금 강원도에서 대학교수로 있는 친구는 본인은 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아직 애들이 어리니 (나와 동갑인데 그 친구 막내가 지금 다섯살이다.) 돈을 더 벌어야하고, (나도 물론 애들이 모두 출가, 독립을 한 경우에도 능력이 있다면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을 만큼은 돈을 벌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어려우니 다시 미국에 들어가 우체국에 공무원으로 취직을해서 계속 돈을 벌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대학교수님께서 우체국에 들어가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어릴적 부터 수없이 들어왔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변신을 쉽게 수용할 분위기가 아직은 요원한 것 같다. 어째서 그런 관념이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지금도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간 부모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이젠 걱정 놓으셔도 되겠네요.. 부럽네요. 한수 배워야 되겠습니다. 등등..
나는 운 좋게도 애들 둘 모두 이름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였고, 큰 녀석은 벌써 대학원을 마치고 취직하고, 결혼도 준비 중이니 주위 동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고있다. 좋은 대학이란 단지 Potential을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려놓은 것일 뿐이지, 그 이후로는 본인의 노력여하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생각을 한다. 앞으로 우리 애들이 무슨 직업을 이어 가게될지 모르지만, 우리 나라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가 성숙 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 배 부른 형편이라 그런지, 벌써 잊었는지, 아니면 애들 모두 말썽없이 아직까지는 승승장구(남이 보기에는 그럴 것 같다.)하고 있어서인지 왜 그렇게 부모가 자식들 대학 진학에 전전긍긍해야 하는지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건강한 몸으로, 본인이 원하는 일을 찾아, 수입에 쪼들리며 얽매이지 않고 만족하며 전념할 수 있었으면 하고 기대할 뿐이다.
나는 너무나 훌륭한 선 후배들을 만나 도움도 많이 받으면서 큰 어려움 없이 직장생활도 무난히 잘 해 왔고, 앞으로 무슨 일을 계속하게 되더라도 아내나 자식들이 이해를 해 줄테니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자식들도 속을 썩이지 않고 지금껏 오순도순 잘 살아왔으니 나는 누구보다도 참 복 많은 사람이다.
한동안은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한국사람들에 대해 왜일까 하고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대기업의 임원으로 직장 생활을 마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이하의 수준이라고 인정을 받는 직업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직업으로 변신해서 방송이나 잡지에 이름이 오르는 경우도 간혹 볼 수 있고, 또 화제거리가 되고있으니, 아직 그런 면에서 보면 꽤나 폐쇄적인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는데, 오래 미국에서 살다가 지금 강원도에서 대학교수로 있는 친구는 본인은 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아직 애들이 어리니 (나와 동갑인데 그 친구 막내가 지금 다섯살이다.) 돈을 더 벌어야하고, (나도 물론 애들이 모두 출가, 독립을 한 경우에도 능력이 있다면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을 만큼은 돈을 벌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어려우니 다시 미국에 들어가 우체국에 공무원으로 취직을해서 계속 돈을 벌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대학교수님께서 우체국에 들어가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어릴적 부터 수없이 들어왔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변신을 쉽게 수용할 분위기가 아직은 요원한 것 같다. 어째서 그런 관념이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지금도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간 부모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이젠 걱정 놓으셔도 되겠네요.. 부럽네요. 한수 배워야 되겠습니다. 등등..
나는 운 좋게도 애들 둘 모두 이름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였고, 큰 녀석은 벌써 대학원을 마치고 취직하고, 결혼도 준비 중이니 주위 동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고있다. 좋은 대학이란 단지 Potential을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려놓은 것일 뿐이지, 그 이후로는 본인의 노력여하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생각을 한다. 앞으로 우리 애들이 무슨 직업을 이어 가게될지 모르지만, 우리 나라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가 성숙 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 배 부른 형편이라 그런지, 벌써 잊었는지, 아니면 애들 모두 말썽없이 아직까지는 승승장구(남이 보기에는 그럴 것 같다.)하고 있어서인지 왜 그렇게 부모가 자식들 대학 진학에 전전긍긍해야 하는지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건강한 몸으로, 본인이 원하는 일을 찾아, 수입에 쪼들리며 얽매이지 않고 만족하며 전념할 수 있었으면 하고 기대할 뿐이다.
나는 너무나 훌륭한 선 후배들을 만나 도움도 많이 받으면서 큰 어려움 없이 직장생활도 무난히 잘 해 왔고, 앞으로 무슨 일을 계속하게 되더라도 아내나 자식들이 이해를 해 줄테니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자식들도 속을 썩이지 않고 지금껏 오순도순 잘 살아왔으니 나는 누구보다도 참 복 많은 사람이다.
대학 교수나 남을 가르치는 신분을 지닌 사람이 삶의 보람을 찾는다면 무엇일까?
아마 후배 제자들이 성장해 가며 한몫하는 인물로 자리 잡는 것을 보는 것이 그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한다.
"음악의 자유인", 박인수 교수님에 대해서는 언젠가 방송에서 본인이 미국 뉴욕에서 무일푼으로 공부하던 시절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고, "향수"를 이동원과 불러 동료 성악인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천박한 대중가요를 불렀다는 이유로 그렇게 궁지에 몰리게 되었겠지만 (난 아직 천박하다거나 고상하다거나 하는 음악의 기준을 모르겠고, 정하고 싶지도 않다. 어떤 음악이든 듣는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고,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이미 충분조건을 갖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음반이 130만장이나 팔렸다고 하니 금전으로라도 대신 보상을 받았을 것 같았다.
거룩한 성악을 하는 사람은 유행가나 팝송을 부르면 안되는 풍토... 어딜 가나 비슷한 배타적인 분위기를 많이 들어왔다. 순수함보다는 정치와 타협함이 훨씬 우세한 상황을...
어제의 연주는 놀라운 가창력을 지닌 후배들과 여유있게 다양한 곡을 이끌어 모든 것 잊고 푹 빠지게 해 주었다. 우리 나라에도 훌륭한 성악가가 아직 많이 숨어 있음을 확인하고 나니 웬지 뿌듯함을 느끼며, 밝은 내일이 그려졌다. 더구나 우리 가곡과 민요를 자랑스러워하며 가까이 하려는 성악인이 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니...
남성 합창단의 힘을 느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모처럼 방학을 맞은 아내와 더구나 곧 우리집 새 식구로 들어올 며느리 후보와 함께 할 수 있었으니 행복이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실감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리움을 나서며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차피 원하는 만큼은 채울 수 없는 급료수준을 조금만 스스로 낮춰 보면, 조금 싼 옷이라도 입어서 편하기만 하다면, 한 겨울 집안이 추워도 함께 사는 가족들이 서로를 감싸주려는 마음이 따뜻하다면, 아내가 차려 주는 소박한 밥상에서 숨겨진 사랑을 찾아낼 수 있다면, 명예나 지위가 조금 낮더라도 믿고 의지하고 밀어주는 선 후배가 주변에 있다면, 눈 덮힌 산속에서 나눠먹는 따끈한 라면의 맛을 되 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
아직 어제 듣던 힘찬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쟁쟁하고, 뜨거웠던 열기가 가슴에 가득한 지금도 행복을 느끼고 있는 순간이다.
아마 후배 제자들이 성장해 가며 한몫하는 인물로 자리 잡는 것을 보는 것이 그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한다.

거룩한 성악을 하는 사람은 유행가나 팝송을 부르면 안되는 풍토... 어딜 가나 비슷한 배타적인 분위기를 많이 들어왔다. 순수함보다는 정치와 타협함이 훨씬 우세한 상황을...
어제의 연주는 놀라운 가창력을 지닌 후배들과 여유있게 다양한 곡을 이끌어 모든 것 잊고 푹 빠지게 해 주었다. 우리 나라에도 훌륭한 성악가가 아직 많이 숨어 있음을 확인하고 나니 웬지 뿌듯함을 느끼며, 밝은 내일이 그려졌다. 더구나 우리 가곡과 민요를 자랑스러워하며 가까이 하려는 성악인이 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니...
남성 합창단의 힘을 느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모처럼 방학을 맞은 아내와 더구나 곧 우리집 새 식구로 들어올 며느리 후보와 함께 할 수 있었으니 행복이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실감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리움을 나서며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차피 원하는 만큼은 채울 수 없는 급료수준을 조금만 스스로 낮춰 보면, 조금 싼 옷이라도 입어서 편하기만 하다면, 한 겨울 집안이 추워도 함께 사는 가족들이 서로를 감싸주려는 마음이 따뜻하다면, 아내가 차려 주는 소박한 밥상에서 숨겨진 사랑을 찾아낼 수 있다면, 명예나 지위가 조금 낮더라도 믿고 의지하고 밀어주는 선 후배가 주변에 있다면, 눈 덮힌 산속에서 나눠먹는 따끈한 라면의 맛을 되 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
아직 어제 듣던 힘찬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쟁쟁하고, 뜨거웠던 열기가 가슴에 가득한 지금도 행복을 느끼고 있는 순간이다.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라스베가스, 자이언 국립공원, 그랜드캐니언까지 돌아본 고속도로 주변은 변화무쌍한 경치를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을 든다면,
- 공기가 맑아 가시거리가 충분하나 눈이 부셔서 선글래스를 써야한다.
- 방음벽을 설치하지 않아서인지 확 트인 느낌이다.
- 고속도로는 공짜다. 유로도로는 샌프란시스코 진입 시 다리를 건널 때만 받는다.
- 캘리포니아 하면 오렌지가 떠오르는데, 겨울철 1월에도 싱싱한 푸른 잎새와 주황색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과수원이 자주 눈에 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과일 종류를 알 수 없는 과수원이 수없이 펼쳐져 있어 밀려오고 있는 수입개방을 걱정하게 한다.
- 유난히 커다란 트레일러를 자주 만날 수 있는데, 그 트레일러는 인도의 트럭에 온갖 색채로 치장을 하듯 다양한 모습을 하고있고 번쩍이는 장식물이 멋지게 장식이 되어있어 외형에서 오는 위압감 보다는 오히려 디자인 예술 작품을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 우리는 골프장을 만든다고 멀쩡한 산을 깎아 내며 자연을 파괴하고 있고, 환경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서부에는 잔디만 조금 심으면 즉시 골프장으로 바뀔 모양을 하고있는 지형이 줄 서있다.
- 끝 없는 직선도로를 자주 만날 수 있고, 고속도로상에 다리를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 도로표지판은 아주 알아보기 쉽게 잘 되어있고, 출구마다 Exit No.를 정해두었기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지나칠 염려가 없다.
- 휴게소는 없다. 주유소는 도로 주변의 도시나 마을을 찾아 들어가야 찾을 수 있고, 나라가 크다보니 주유소가 있을 만한 마을사이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항상 주유에 신경을 써야 한다.
-비상전화는 도로가장자리에 일정간격으로 설치가 되어있어 안전에 대비하는 의식을 엿볼 수 있다. 휴대폰이 만병통치인 우리나라보다는 저 개발국(?) 이다.
-난폭운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갖가지 모양을 한 RV차량 (Recreational Vehicle)이 많이 눈에 띄어. 여행 욕심을 부추긴다.
- 대개 최고속도를 65마일(104 KM)로 제한하고 있으며 10마일 정도의 과속은 허용한다 하니 75마일(120KM)로 달린다면 우리와 비슷하지만 직선으로 뚫려 있는 도로가 많고, 끼어 들기를 하지 않으므로 안전하게 느껴진다.
- AAA에서 구한 지도는 자세하고, 특히 지도마다 자세히 나와있는 도시간 소요시간표는 정확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규정 속도로 달린다면 오차가 별로 없을것으로 판단이 된다.
휴가철에 다녀본 것이 아니라 항상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사고가 나지않는한 한산해 보이는 도로사정이 정말 부러웠다. 더구나 무료니!!
정신없이 보낸 여행일정을 잊기 전에 정리해 보았다.
미리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기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 면도 있지만, 대신 얻은 것도 많았다.
다시 비슷한 곳을 들리려 한다면 물론 조금 다른 코스를 택하겠지만, 날씨가 뒷다리를 잡을 수 도 있고, 도로사정이나 다른 변수가 작용하여 전혀 다른 코스로 전환할 수도 있으리라.
여행 일정만 보면;
금요일 저녁(12월 30일) 인천 출발--> 샌프란시스코(1박) --> 라스베가스 (2박) --> 자이언 국립공원--> 브라이스 캐니언--> 페이지(3박) -->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 림 --> 라스 베가스 (4박) --> 데스 벨리--> 베이커스 필드(5박) --> 킹스 캐니언 --> 샌프란시스코(6박) --> 몬터레이,카멜 --> 샌프란시스코(7박,8박)--> 귀국 (1월 7일, 8일, 일요일 저녁 인천도착) 이었다.
동생 식구들과 하루를 지내기 위해 무리가 되는 일정으로 짜 맞추려니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9시 까지 꼬박 차에서 시간을 대부분 보내야만 했고, 아쉽게도 국립공원 안을 둘러보며 산책을 할 수 있는 시간도 거의 낼 수가 없었다.
만일 비슷한 루트로 다시 돌아본다면;
금요일 저녁 인천 출발--> 샌프란시스코(1박) --> 몬터레이 --> 베이커스 필드(2박) --> 데스 벨리 --> 윌리엄스(2박) --> 그랜드 캐니언 --> 모뉴먼트 벨리--> 블랜딩(3박)--> 아치스 국립공원 -->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 --> 브라이스 캐니언(4박) --> 자이언 국립공원 --> 라스 베가스 (5박) --> 킹스 캐니언 --> 요세미티 국립공원(6박) --> 샌프란시스코(7박,8박)--> 귀국 일요일 저녁 인천도착), 역시 트레일은 생각하기 곤란한 일정이다. 겨울철에는 물론 불가능한 코스이다.
우선 눈도장과 사진으로 증명서만을 남기고 다시 꼭 가보고 싶은 곳만을 골라 한곳에 하루 이상씩을 투자해 머무는것이 훨씬 실속있는 여행이 될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엄두를 내기 어려울것만같다.
겨울철이라 그랜드 캐니언의 노스림이 닫혔고,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관통하는 티오가 패스, 킹스 캐니언의 관통도로도 막혀있어 코스를 정하기가 곤란했지만, 멀리 돌아가며 시간을 빼앗긴 대신에 눈으로 덮힌 경치를 바라보는 즐거움이 충분히 보상을 해 주었다.
무슨일을 하든 어떤 결정을 하든 잃는 것이 있다면, 대신 얻는 것이 뒤따르게 마련이니, 세상이치는 너무나 공평하기만 하다.
도로를 달리며 차에서 보낸 시간이 아깝지 만은 않았다.
길가의 경치는 우리 나라와 전혀 다른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 주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으니, 여행만 한다면 미국은 여러모로 아주 잘 갖춰진 나라다.
우리나라도 전보다는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국립공원 관리 상황을 비교한다면 아직 요원한 수준이다.
단위 면적당 관광인구가 너무나 차이가 나니 통제에도 물론 어려움이 있겠지만, 국민의 의식수준 또한 한참 쫓아가야 하는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구석구석을 돌아보려면 한두달은 족히 투자를 해야하거늘 일주일 돌아보며 뭘 봤다고 할 수 있을까?
맑은 공기 실컷 마시며, 동생과 식구들과 그간 나눈 많은 이야기가 마음에 가득 남아있기에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미리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기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 면도 있지만, 대신 얻은 것도 많았다.
다시 비슷한 곳을 들리려 한다면 물론 조금 다른 코스를 택하겠지만, 날씨가 뒷다리를 잡을 수 도 있고, 도로사정이나 다른 변수가 작용하여 전혀 다른 코스로 전환할 수도 있으리라.

여행 일정만 보면;
금요일 저녁(12월 30일) 인천 출발--> 샌프란시스코(1박) --> 라스베가스 (2박) --> 자이언 국립공원--> 브라이스 캐니언--> 페이지(3박) -->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 림 --> 라스 베가스 (4박) --> 데스 벨리--> 베이커스 필드(5박) --> 킹스 캐니언 --> 샌프란시스코(6박) --> 몬터레이,카멜 --> 샌프란시스코(7박,8박)--> 귀국 (1월 7일, 8일, 일요일 저녁 인천도착) 이었다.
동생 식구들과 하루를 지내기 위해 무리가 되는 일정으로 짜 맞추려니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9시 까지 꼬박 차에서 시간을 대부분 보내야만 했고, 아쉽게도 국립공원 안을 둘러보며 산책을 할 수 있는 시간도 거의 낼 수가 없었다.
만일 비슷한 루트로 다시 돌아본다면;
금요일 저녁 인천 출발--> 샌프란시스코(1박) --> 몬터레이 --> 베이커스 필드(2박) --> 데스 벨리 --> 윌리엄스(2박) --> 그랜드 캐니언 --> 모뉴먼트 벨리--> 블랜딩(3박)--> 아치스 국립공원 -->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 --> 브라이스 캐니언(4박) --> 자이언 국립공원 --> 라스 베가스 (5박) --> 킹스 캐니언 --> 요세미티 국립공원(6박) --> 샌프란시스코(7박,8박)--> 귀국 일요일 저녁 인천도착), 역시 트레일은 생각하기 곤란한 일정이다. 겨울철에는 물론 불가능한 코스이다.
우선 눈도장과 사진으로 증명서만을 남기고 다시 꼭 가보고 싶은 곳만을 골라 한곳에 하루 이상씩을 투자해 머무는것이 훨씬 실속있는 여행이 될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엄두를 내기 어려울것만같다.
겨울철이라 그랜드 캐니언의 노스림이 닫혔고,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관통하는 티오가 패스, 킹스 캐니언의 관통도로도 막혀있어 코스를 정하기가 곤란했지만, 멀리 돌아가며 시간을 빼앗긴 대신에 눈으로 덮힌 경치를 바라보는 즐거움이 충분히 보상을 해 주었다.
무슨일을 하든 어떤 결정을 하든 잃는 것이 있다면, 대신 얻는 것이 뒤따르게 마련이니, 세상이치는 너무나 공평하기만 하다.
도로를 달리며 차에서 보낸 시간이 아깝지 만은 않았다.
길가의 경치는 우리 나라와 전혀 다른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 주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으니, 여행만 한다면 미국은 여러모로 아주 잘 갖춰진 나라다.
우리나라도 전보다는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국립공원 관리 상황을 비교한다면 아직 요원한 수준이다.
단위 면적당 관광인구가 너무나 차이가 나니 통제에도 물론 어려움이 있겠지만, 국민의 의식수준 또한 한참 쫓아가야 하는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구석구석을 돌아보려면 한두달은 족히 투자를 해야하거늘 일주일 돌아보며 뭘 봤다고 할 수 있을까?
맑은 공기 실컷 마시며, 동생과 식구들과 그간 나눈 많은 이야기가 마음에 가득 남아있기에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이번 여행은 미국이란 낯선 나라에서 가정을 이끌고, 공부하고 학위를 받느라 이런저런 마음고생이 많았던 동생이 없었다면 아마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 조카를 키우며 유치원으로 초등학교로 쳇바퀴돌며 돌보기 바쁜 제수씨도 물론 어려움이 많겠지만, 아직도 어딜 가나 대~~한민국 출신 가장의 부담이 가장 크지 않을까 한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미국 여행을 나서기란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막내동생은 그 바쁜 연구소 일을 제쳐 두고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준다고 온종일 운전하며 너무애를 많이 써주었다.
별로 잘 찍지도 못하는 사진 한 장이라도 더 건져 보겠다고, 시간을 이래저래 지체시켜 동생을 더욱 피곤하게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부부가 함께 의지하며 살더라도 외국에서 더구나 유색인종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쌓인 나라에서 한 가정을 이끌어가기는 쉽지 않겠구나 하는 것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실감할 수 있었다.
조카 녀석들이 서로 똘똘 뭉쳐 사이좋게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오랜만에 맛본 즐거움이었다.
우리 애들도 그 또래엔 그랬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지난날의 추억을 되 살려 준 한 주일이었다.
그렇게 콩 볶듯 토닥이며 함께 성장하여, 어느새 큰 녀석은 가정을 이룰 준비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세월은 빠르다.
어떤 여행이나 결과는 마찬가지... 남는 건 사진뿐이란 것이다. 서투른 솜씨로, 기대했던 만큼 사진을 건질 수는 없었고, 역시 예전처럼 아쉬움만 남은 여행이 되고 말았다.
멀리 머물고 있어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처지지만, 동생의 변함없는 우애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소득이었다.
이번 여행엔 전에 없던 따뜻함이 마음 구석구석에 가득 남아 있으니...
두 조카를 키우며 유치원으로 초등학교로 쳇바퀴돌며 돌보기 바쁜 제수씨도 물론 어려움이 많겠지만, 아직도 어딜 가나 대~~한민국 출신 가장의 부담이 가장 크지 않을까 한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미국 여행을 나서기란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막내동생은 그 바쁜 연구소 일을 제쳐 두고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준다고 온종일 운전하며 너무애를 많이 써주었다.

별로 잘 찍지도 못하는 사진 한 장이라도 더 건져 보겠다고, 시간을 이래저래 지체시켜 동생을 더욱 피곤하게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부부가 함께 의지하며 살더라도 외국에서 더구나 유색인종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쌓인 나라에서 한 가정을 이끌어가기는 쉽지 않겠구나 하는 것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실감할 수 있었다.
조카 녀석들이 서로 똘똘 뭉쳐 사이좋게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오랜만에 맛본 즐거움이었다.
우리 애들도 그 또래엔 그랬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지난날의 추억을 되 살려 준 한 주일이었다.
그렇게 콩 볶듯 토닥이며 함께 성장하여, 어느새 큰 녀석은 가정을 이룰 준비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세월은 빠르다.
어떤 여행이나 결과는 마찬가지... 남는 건 사진뿐이란 것이다. 서투른 솜씨로, 기대했던 만큼 사진을 건질 수는 없었고, 역시 예전처럼 아쉬움만 남은 여행이 되고 말았다.
멀리 머물고 있어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처지지만, 동생의 변함없는 우애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소득이었다.
이번 여행엔 전에 없던 따뜻함이 마음 구석구석에 가득 남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