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서 소근소근/비처럼 음악처럼'에 해당되는 글 121건
- 2005.10.06 오래된 미래
- 2005.09.23 유럽 축구리그 소개
- 2005.09.23 보고 (報告)
- 2005.09.22 행복을 느끼기
- 2005.09.15 글렌 굴드를 만나면...
- 2005.09.08 아무도 갖지 않은 부 (법정 스님)
- 2005.09.06 잡초는 없다. (윤구병 님)
- 2005.09.06 참된 시인이란... (윤구병 님)
- 2005.09.05 너무 잘나가면 잘리는 세상....
- 2005.09.01 부석사 무량수전
인도 북부의 산악지방 라다크를 다녀온 일년 전 기억을 되짚어 본다.
작년 여름 이맘때 다녀온 라다크는 워낙 인상 깊었던 곳이라서 그런지 워낙 넓은 지역이라 한구석만 보고 온 여행이었지만 아직도 마음이 그곳에 머물러 있다… 왜 그럴까? 노래 가사처럼...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한동안은 보약을 먹은 듯이 그 약효가 지속되기 마련이지만, 왜 유독 라다크만 마음속 깊이 구석 구석이 채워져 빈틈을 주지 않는 것일까?
지금까지 바다 밖으로 여러 나라를 다녀보았지만 대부분 얼마 안 지나서 곧 머리 속에서 지워져 버리게 되고, 사진만 남고 말았는데, 라다크는 아직도 첫 인상부터 그대로 남아있어 담아온 사진을 펼쳐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황량하고, 척박하고, 생활 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는 너무도 소박하고, 순수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며칠밖에 머물지 않았던 Leh에 있는 Shamba-La Hotel은 기껏해야 우리나라의 장급도 되지않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곳의 직원들은 모두 겸손하고 소박한 천사였고, 어린아이들처럼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홍차를 갖다 줄 때 팀을 주면 쑥스러워 꽁무니를 빼는 듯한 제스처를 하기도 하고, 매사를 지나치다 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곤 했다.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 계통이 대부분이어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르나, 꼬집어 낼 수 없는 무엇이 그들의 생활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Check-out 할 때 숙박비를 깎아주며 건넨 마지막 인사는 “Are you Happy”였다. 대답도 간단했다. “Yes” 지금껏 Hotel에서 그런 인사를 주고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럽기도 했었지만…
지구 온난화로 그곳 기후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고, 겨우내 쌓인 눈이 서서히 녹으면서 흐르는 물로 생활하는 그곳에 어쩌면 몬순이 오기 전 개울물이 모두 메말라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머지않아 인더스 강도 말라버리게 된다고... 문명의 이기를 마구 남용하여 지구 온난화를 초래하는 주동자, 그로 인해 혜택을 받는 것은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배부른 사람들인데 그토록 척박한 지역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째서 그런 피해가 미치게 되는지 안타깝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다시 가 보고픈 마음 간절한 곳이다. 아내의 심각한 고산증세를 친절하게 치료해 주던 시골 농군 같은 의사 선생님, 한 가족 같던 호텔 직원들 - 내 큰 아들처럼 키 큰 Mr. Tenzin, 나보다 훨씬 나이어린 젊은 할아버지 Mr. Nawan, 주인 아줌마 Mrs. Norbu, 기사녀석 Mr. Tukje – 을 만나 “Since we were very happy with you last time, I could not help visiting Ladakh again” 이라고 말해 줄 것이다.
인도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마다 다른 감정을 갖게하는 독특한 나라다. 다시는 안 오겠다고 하다가도 얼마 지나면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나게 하는 나라라고 하기도 하고, 그들의 삶이 너무나 비참하고, 길가의 거지들, 지저분하기만 한 주위환경에 질려서 다시는 안 가겠다고 넌더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여행계획 꾸리기가 만만치 않고, 비용도 제법 많이 들지만 들어간 자금(?)의 몇 배를 마음속에 넉넉히 거둘 수 있는, 누구에게라도 추천할 만한 인상 깊은 곳이 아직은 여행하기 불편한 “오래된 미래” 라다크 지역이다.
70년대에 처음 개방되던 때에는 사람들의 삶이 지금보다도 훨씬 순수했고, 공해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최근에는 서구 문명에 오염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사고 방식이 바뀌는 등 여러 방면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악화되고 있다고 한다.
인프라가 좋아져서 찾는 사람들이 늘게 되면 천사 같은 그곳 사람들의 순박함도 함께 옅어지게 될 테니 그곳 여행은 “The Sooner, the better”라 하겠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한동안은 보약을 먹은 듯이 그 약효가 지속되기 마련이지만, 왜 유독 라다크만 마음속 깊이 구석 구석이 채워져 빈틈을 주지 않는 것일까?
지금까지 바다 밖으로 여러 나라를 다녀보았지만 대부분 얼마 안 지나서 곧 머리 속에서 지워져 버리게 되고, 사진만 남고 말았는데, 라다크는 아직도 첫 인상부터 그대로 남아있어 담아온 사진을 펼쳐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황량하고, 척박하고, 생활 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는 너무도 소박하고, 순수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며칠밖에 머물지 않았던 Leh에 있는 Shamba-La Hotel은 기껏해야 우리나라의 장급도 되지않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곳의 직원들은 모두 겸손하고 소박한 천사였고, 어린아이들처럼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홍차를 갖다 줄 때 팀을 주면 쑥스러워 꽁무니를 빼는 듯한 제스처를 하기도 하고, 매사를 지나치다 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곤 했다.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 계통이 대부분이어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르나, 꼬집어 낼 수 없는 무엇이 그들의 생활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Check-out 할 때 숙박비를 깎아주며 건넨 마지막 인사는 “Are you Happy”였다. 대답도 간단했다. “Yes” 지금껏 Hotel에서 그런 인사를 주고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럽기도 했었지만…
지구 온난화로 그곳 기후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고, 겨우내 쌓인 눈이 서서히 녹으면서 흐르는 물로 생활하는 그곳에 어쩌면 몬순이 오기 전 개울물이 모두 메말라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머지않아 인더스 강도 말라버리게 된다고... 문명의 이기를 마구 남용하여 지구 온난화를 초래하는 주동자, 그로 인해 혜택을 받는 것은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배부른 사람들인데 그토록 척박한 지역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째서 그런 피해가 미치게 되는지 안타깝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다시 가 보고픈 마음 간절한 곳이다. 아내의 심각한 고산증세를 친절하게 치료해 주던 시골 농군 같은 의사 선생님, 한 가족 같던 호텔 직원들 - 내 큰 아들처럼 키 큰 Mr. Tenzin, 나보다 훨씬 나이어린 젊은 할아버지 Mr. Nawan, 주인 아줌마 Mrs. Norbu, 기사녀석 Mr. Tukje – 을 만나 “Since we were very happy with you last time, I could not help visiting Ladakh again” 이라고 말해 줄 것이다.

70년대에 처음 개방되던 때에는 사람들의 삶이 지금보다도 훨씬 순수했고, 공해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최근에는 서구 문명에 오염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사고 방식이 바뀌는 등 여러 방면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악화되고 있다고 한다.
인프라가 좋아져서 찾는 사람들이 늘게 되면 천사 같은 그곳 사람들의 순박함도 함께 옅어지게 될 테니 그곳 여행은 “The Sooner, the better”라 하겠다.
궁금했던 사항이었는데 마침 서형욱님의 책, "유럽 축구기행"에 유럽축구리그에 대한 소개가 있어 옮겨놓았다.
우리나라 K- 리그의 수준과 비교도 되고, 외국에서는 믿지 않을 얇은 선수층, 한심스러운 국가의 축구정책, 국민의 반짝 남비성 관심 속에서 2002 월드컵 4강에 오른 태극전사 - 어쩌다 '전사'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 들의 성적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K - 리그가 싱싱하게 살아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
<챔피언스리그와 UEFA컵>
두 대회는 모두 유럽축구연맹(UEFA)이 주관하는 국제 클럽 대항전이다. 챔피언스리그 (Champions League)는 이름 그대로 유럽 각국리그 우승팀들이 모여 경합하는 대회다. 그러나 지난 1992년 이후 진행방식에 변화를 주었고, 지금은 강한 팀을 많이 보유한 리그에서 더 많은 팀을 출전 시킬 수 있도록 바뀌었다. 이탈리아. 스페인, 잉글랜드의 경우 최대 4개 팀을 챔피언스리그 본선 32강에 출전 시킬 수 있다. 따라서 각 나라의 리그는 우승팀이 결정된 뒤에도 여전히 치열하게 진행되는데 챔피언스리그 출전이 막대한 금전수익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반면, UEFA컵은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지 못한 팀들 중에서 리그 순위가 높은 팀들이 출전하는 대회다. 리그 2~3의 팀들이 주로 출전할 당시에 비하면 위상이 많이 격하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권위를 인정 받고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는 지난 1992년에 창설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100년이 훨씬 넘는데 프리미어리그 창설 이전에는 1부 리그(디비전1)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1889년에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는 프리미어리그 외에도 각각 2, 3, 4부 리그에 해당하는 챔피언십리그, 리그1, 리그2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축구 클럽이 존재하지만 4부 리그까지만 프로리그에 해당한다. 프리미어리그에는 모두 20개 팀이 참가하는데 매 시즌이 끝나면 하위 3개 팀은 2부 리그로 추락한다. 대신 2부 리그 상위 2개 팀과3~6위 간 플레이 오프를 거쳐 승리한 1개 팀이 다음 시즌 프리미어리그에 합류한다. 이 같은 승강제는 하위 리그간에도 마찬가지이며 다른 나라에서도 대동소이하다. 리그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은 리버풀로 모두 18번 정상에 올랐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15회)와 아스날(13회)도 10번 이상의 우승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밖에 첼시, 뉴캐슬 유나이티드 등이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거두는 팀으로 꼽힌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레알 마드리드, FC바르셀로나가 이끄는 스페인 리그는 지난 1929년에 창설되었다. 세계 최고 명문 팀으로 꼽히는 두 팀 외에도 발렌시아, 데포르티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애슬레틱 빌바오 등이 유명하다. 1부 리그 격인 프리메라리가에는 모두 20개의 팀이 속해 있으며 매년 하위3개 팀이 2부 리그인 세군다리가의 상위 3개 팀과 자리를 맞바꾼다. 1990년대 중반이후 챔피언스리그, UEFA컵과 같은 국제 클럽대항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탈리아 세리에A>
이탈리아 리그는 최상위 리그인 세리에A와 2부 리그격인 세리에B, 그리고 세리에 C1/C2와 세리에D로 나누어져있다. 모두 20개 팀이 속한 세리에A를 상징하는 팀은 유벤투스, AC 밀란, 인터밀란이다. 지난 1929년에 리그가 창설된 이래 이 세 팀이 리그의 역사를 삼분해왔다. 세리에A의 리그 우승은 ‘ 스쿠데토(Scudetto)’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우승팀이 다음 시즌 유니폼에 방패모양의 이탈리아 국기를 부탁하도록 조처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네델란드 에레디비지에>
박지성, 이영표 콤비의 활약으로 친숙해진 에레디비지에는 네델란드 프로축구 1부 리그에 해당한다. 아약스, PSV 아인트호벤, 페에노르트 등의 3개 팀과 나머지 팀들간의 전력차가 워낙 심한 것이 특징이다. 성적에 따라 자격을 부여하는 유럽 클럽대항전 출전은 대부분 이 세 개 팀이 나눠 갖는다.
<독일 분데스리가>
권역별 우승 팀들이 모여 최종 승자를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 되었던 독일 프로축구는 통합 리그인 분데스리가의 탄생과 함께 유럽 축구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독보적인 명문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 42년의 역사동안 우승컵을 19번 들어올렸고 뉘른베르크(9회), 살케04(7회), 도르트문트, 함부르크(이상 6회) 등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최근 몇 년간 스타선수 영입에 실패하면서 경기력도 떨어져 현재는 프랑스 리그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있다.
<프랑스 리그>
1917년에 출범한 프랑스 리그는 전쟁으로 정식 리그가 운용되지 않은 1939~1945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이어져왔다. 1981년 이후 우승 컵을 차지한 일 없는 생테티엔이 10회로 가장 많은 우승컵을 가져갔지만 유럽클럽대항전에서 우승 경력을 가진 올랭피크 마르세유와 파리 셍제르망이 대표적인 클럽으로 꼽힌다. 2004/2005시즌 우승으로 리그 4연패를 달성한 올랭피크 리옹은 신흥 강호로 각광 받고 있는 팀. 대부분의 아프리카 선수들이 거쳐가는 리그로 최근 들어 경기장 안팎에서 급속히 세를 확장하고 있다.
(축구 칼럼리스트 서형욱 님)
우리나라 K- 리그의 수준과 비교도 되고, 외국에서는 믿지 않을 얇은 선수층, 한심스러운 국가의 축구정책, 국민의 반짝 남비성 관심 속에서 2002 월드컵 4강에 오른 태극전사 - 어쩌다 '전사'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 들의 성적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K - 리그가 싱싱하게 살아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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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리그와 UEFA컵>
두 대회는 모두 유럽축구연맹(UEFA)이 주관하는 국제 클럽 대항전이다. 챔피언스리그 (Champions League)는 이름 그대로 유럽 각국리그 우승팀들이 모여 경합하는 대회다. 그러나 지난 1992년 이후 진행방식에 변화를 주었고, 지금은 강한 팀을 많이 보유한 리그에서 더 많은 팀을 출전 시킬 수 있도록 바뀌었다. 이탈리아. 스페인, 잉글랜드의 경우 최대 4개 팀을 챔피언스리그 본선 32강에 출전 시킬 수 있다. 따라서 각 나라의 리그는 우승팀이 결정된 뒤에도 여전히 치열하게 진행되는데 챔피언스리그 출전이 막대한 금전수익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반면, UEFA컵은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지 못한 팀들 중에서 리그 순위가 높은 팀들이 출전하는 대회다. 리그 2~3의 팀들이 주로 출전할 당시에 비하면 위상이 많이 격하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권위를 인정 받고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는 지난 1992년에 창설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100년이 훨씬 넘는데 프리미어리그 창설 이전에는 1부 리그(디비전1)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1889년에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는 프리미어리그 외에도 각각 2, 3, 4부 리그에 해당하는 챔피언십리그, 리그1, 리그2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축구 클럽이 존재하지만 4부 리그까지만 프로리그에 해당한다. 프리미어리그에는 모두 20개 팀이 참가하는데 매 시즌이 끝나면 하위 3개 팀은 2부 리그로 추락한다. 대신 2부 리그 상위 2개 팀과3~6위 간 플레이 오프를 거쳐 승리한 1개 팀이 다음 시즌 프리미어리그에 합류한다. 이 같은 승강제는 하위 리그간에도 마찬가지이며 다른 나라에서도 대동소이하다. 리그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은 리버풀로 모두 18번 정상에 올랐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15회)와 아스날(13회)도 10번 이상의 우승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밖에 첼시, 뉴캐슬 유나이티드 등이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거두는 팀으로 꼽힌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레알 마드리드, FC바르셀로나가 이끄는 스페인 리그는 지난 1929년에 창설되었다. 세계 최고 명문 팀으로 꼽히는 두 팀 외에도 발렌시아, 데포르티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애슬레틱 빌바오 등이 유명하다. 1부 리그 격인 프리메라리가에는 모두 20개의 팀이 속해 있으며 매년 하위3개 팀이 2부 리그인 세군다리가의 상위 3개 팀과 자리를 맞바꾼다. 1990년대 중반이후 챔피언스리그, UEFA컵과 같은 국제 클럽대항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탈리아 세리에A>
이탈리아 리그는 최상위 리그인 세리에A와 2부 리그격인 세리에B, 그리고 세리에 C1/C2와 세리에D로 나누어져있다. 모두 20개 팀이 속한 세리에A를 상징하는 팀은 유벤투스, AC 밀란, 인터밀란이다. 지난 1929년에 리그가 창설된 이래 이 세 팀이 리그의 역사를 삼분해왔다. 세리에A의 리그 우승은 ‘ 스쿠데토(Scudetto)’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우승팀이 다음 시즌 유니폼에 방패모양의 이탈리아 국기를 부탁하도록 조처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네델란드 에레디비지에>
박지성, 이영표 콤비의 활약으로 친숙해진 에레디비지에는 네델란드 프로축구 1부 리그에 해당한다. 아약스, PSV 아인트호벤, 페에노르트 등의 3개 팀과 나머지 팀들간의 전력차가 워낙 심한 것이 특징이다. 성적에 따라 자격을 부여하는 유럽 클럽대항전 출전은 대부분 이 세 개 팀이 나눠 갖는다.
<독일 분데스리가>
권역별 우승 팀들이 모여 최종 승자를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 되었던 독일 프로축구는 통합 리그인 분데스리가의 탄생과 함께 유럽 축구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독보적인 명문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 42년의 역사동안 우승컵을 19번 들어올렸고 뉘른베르크(9회), 살케04(7회), 도르트문트, 함부르크(이상 6회) 등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최근 몇 년간 스타선수 영입에 실패하면서 경기력도 떨어져 현재는 프랑스 리그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있다.
<프랑스 리그>
1917년에 출범한 프랑스 리그는 전쟁으로 정식 리그가 운용되지 않은 1939~1945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이어져왔다. 1981년 이후 우승 컵을 차지한 일 없는 생테티엔이 10회로 가장 많은 우승컵을 가져갔지만 유럽클럽대항전에서 우승 경력을 가진 올랭피크 마르세유와 파리 셍제르망이 대표적인 클럽으로 꼽힌다. 2004/2005시즌 우승으로 리그 4연패를 달성한 올랭피크 리옹은 신흥 강호로 각광 받고 있는 팀. 대부분의 아프리카 선수들이 거쳐가는 리그로 최근 들어 경기장 안팎에서 급속히 세를 확장하고 있다.
(축구 칼럼리스트 서형욱 님)
조정에서 이정암(李廷馣) 공이 왜적에게 포위당했단 말을 듣고 상하가 모두 위태로움을 근심하였다. 이겼다는 보고가 도착 했는데, 단지 ·‘적이 아무 날에 성을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 갔나이다’ 라고만 했지, 일체의 장황한 말이 없었다. 논의하는 사람이 말했다. 적을 물리치기는 쉽다. 공을 자랑하지 않기가 더욱 어렵다.
朝廷聞公被圍, 上下憂危. 及捷至. 只言賊以某日圍城解去, -無張皇語.
議者言 : 却賊易, 不伐功尤難.
-김육(金堉, 1580~1658)
朝廷聞公被圍, 上下憂危. 及捷至. 只言賊以某日圍城解去, -無張皇語.
議者言 : 却賊易, 不伐功尤難.
-김육(金堉, 1580~1658)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 ‘인연’에서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읽었다.
사람이 얼마 길지 않은 삶을 꾸려가면서 사랑할 대상을 마음 한구석에 그리며, 혹시 운이 좋아 곁에 두고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욕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을 욕심이라고까지 하기에는 심한 것 같고, 그러한 바램을 한구석에 묻어두고 사는 것도 결국 틈틈이 행복을 느끼며 살아 갈 수 있는 방편이 아닌가 한다.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면 욕심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소박한 소망을 조금씩 이루어가며 만족함을 느낄 수 있다면 욕심이 아니라 행복하게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자세가 아닐까?
나는 언제 행복을 느꼈을까 ?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니 30가지가 넘는다. 나는 아직까지는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고있나보다.
1. KBS 1 FM을 맞춘 순간,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처럼 평화로운 곡이 연주될 때
2. 베토벤 교향곡 5번이나 6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로 들을 때
3. 진공관 앰프를 켜고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4. 아내와 조용한 찻집에서 케익 조각을 놓고 원두커피를 마실 때
5. 아내가 다림질 해 놓은 옷을 꺼내 입을 때
6. 햇빛에 널어놓았던 뽀송 뽀송한 이불을 덮을 때
7. 비오는 토요일 오후, 따뜻한 아랫목에서 눈을 붙일 때
8. 현상소로 슬라이드 필름을 찾으러 갈 때
9. 칼 뵘 지휘, 빈 필의 연주로 베토벤 교향곡 6번을 들을 때
10. 수원 축구장에서 초록색 잔디를 바라보며 서포터즈의 함성소리를 들을 때
11. 블루윙즈의 선취 골 장면을 보는 순간
12. 이른봄 아침햇살을 받아 빛나는 연 초록 숲의 사진을 찍을 때.
13. 한여름 비를 흠뻑 맞은 느티나무 둥치를 바라볼 때
14. 허쉬 초콜렛 조각을 아내와 나누어 먹을 때
15. 비 온 다음날 아내와 북한산을 올라 소귀천 계곡으로 내려올 때
16. 손자와 손잡고 나들이 나온 할머니의 정이 가득한 눈빛을 볼 때
17. 오대산 월정사 앞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새소리를 들을때
18.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아침 산책을 다시 머리 속으로 그려 볼 때
19. 경주 황남빵을 냉동실에서 꺼낼 때
20. 피천득 선생님이나 정채봉 님 같은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분의 글을 읽을 때
21.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며 나를 되돌아볼 때
22. 국립 박물관에서 분청사기 전시관를 둘러볼 때
23. 아내가 끓여 놓은 된장찌개를 데울 때
24. 파삭 파삭한 찰 강냉이를 먹을 때
25. 인도 라다크를 아내와 다시 여행하는 상상을 할 때
26. 동해 바다 시원한 파도를 바라볼 때
27. 이른 아침, 아내와 활기 넘치는 노량진 수산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
28. 장욱진,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볼 때
29. 김근원 선생님의 흑백사진을 볼 때
30. 안개에 휩싸인 개심사를 아내와 함께 오를 때
31. 부석사 안양루에서 아래를 굽어 볼 때
32. 아내와 배낭여행 계획을 짤 때
33. 안셀 아담스의 사진집, "Classic Images"를 펼칠 때
34. 아내의 사랑을 느낄 때
35. 이른봄 산골짜기 눈녹아 흐르는 물소리가 들릴 때
36.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을 때
사람이 얼마 길지 않은 삶을 꾸려가면서 사랑할 대상을 마음 한구석에 그리며, 혹시 운이 좋아 곁에 두고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욕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을 욕심이라고까지 하기에는 심한 것 같고, 그러한 바램을 한구석에 묻어두고 사는 것도 결국 틈틈이 행복을 느끼며 살아 갈 수 있는 방편이 아닌가 한다.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면 욕심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소박한 소망을 조금씩 이루어가며 만족함을 느낄 수 있다면 욕심이 아니라 행복하게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자세가 아닐까?
나는 언제 행복을 느꼈을까 ?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니 30가지가 넘는다. 나는 아직까지는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고있나보다.
1. KBS 1 FM을 맞춘 순간,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처럼 평화로운 곡이 연주될 때
2. 베토벤 교향곡 5번이나 6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로 들을 때
3. 진공관 앰프를 켜고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4. 아내와 조용한 찻집에서 케익 조각을 놓고 원두커피를 마실 때
5. 아내가 다림질 해 놓은 옷을 꺼내 입을 때
6. 햇빛에 널어놓았던 뽀송 뽀송한 이불을 덮을 때
7. 비오는 토요일 오후, 따뜻한 아랫목에서 눈을 붙일 때
8. 현상소로 슬라이드 필름을 찾으러 갈 때
9. 칼 뵘 지휘, 빈 필의 연주로 베토벤 교향곡 6번을 들을 때
10. 수원 축구장에서 초록색 잔디를 바라보며 서포터즈의 함성소리를 들을 때
11. 블루윙즈의 선취 골 장면을 보는 순간
12. 이른봄 아침햇살을 받아 빛나는 연 초록 숲의 사진을 찍을 때.
13. 한여름 비를 흠뻑 맞은 느티나무 둥치를 바라볼 때
14. 허쉬 초콜렛 조각을 아내와 나누어 먹을 때
15. 비 온 다음날 아내와 북한산을 올라 소귀천 계곡으로 내려올 때
16. 손자와 손잡고 나들이 나온 할머니의 정이 가득한 눈빛을 볼 때
17. 오대산 월정사 앞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새소리를 들을때
18.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아침 산책을 다시 머리 속으로 그려 볼 때
19. 경주 황남빵을 냉동실에서 꺼낼 때
20. 피천득 선생님이나 정채봉 님 같은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분의 글을 읽을 때
21.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며 나를 되돌아볼 때
22. 국립 박물관에서 분청사기 전시관를 둘러볼 때
23. 아내가 끓여 놓은 된장찌개를 데울 때
24. 파삭 파삭한 찰 강냉이를 먹을 때
25. 인도 라다크를 아내와 다시 여행하는 상상을 할 때
26. 동해 바다 시원한 파도를 바라볼 때
27. 이른 아침, 아내와 활기 넘치는 노량진 수산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
28. 장욱진,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볼 때
29. 김근원 선생님의 흑백사진을 볼 때
30. 안개에 휩싸인 개심사를 아내와 함께 오를 때
31. 부석사 안양루에서 아래를 굽어 볼 때
32. 아내와 배낭여행 계획을 짤 때
33. 안셀 아담스의 사진집, "Classic Images"를 펼칠 때
34. 아내의 사랑을 느낄 때
35. 이른봄 산골짜기 눈녹아 흐르는 물소리가 들릴 때
36.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을 때

처음 5번 교향곡 제 2악장의 연주를 들었을 때,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원곡보다도 오히려 더욱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을 받았고, 요즘 다시 들어봐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하게 되 살아 난다. Sony에서 특집 음반으로 그의 연주를 CD에 모두 담아 발매를 한 덕분에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지금에도 그의 연주를 얼마든지 다시 들을 수 있으니, 위대한 발명가 에디슨이 처음 열어준 녹음의 세계에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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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예술가
정상명 님
오래 전 어느 겨울 낸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피아노 음악 소품들이 배경음으로 여러 편 이어지는 영화에 시선이 멎게 되었다. 오래 된 일이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피아노 음악이 영화의 대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전체 색조는 매우 우울하며 내면적이었다.
피아노 연주자는 글렌 굴드였다. 당시 나는 글렌 굴드에 대하여서는 아무 지식이 없던 터였지만 그 영화는 오랫동안 내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얼마 뒤 글렌 굴드의 음반 한 장을 선물 받았다. 영화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터라 받자마자 음반을 걸어놓았다. 저녁 무렵이었다. 서면 창으로 햇살이 조용히 들어와 작업실 마루 위에 부드러운 무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멜로디를 따라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남자의 허밍소리가 들려왔다. 속삭이듯 부드럽고 낮은 소리였다. 너무나 놀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머리끝이 쭈뼛하게 일어서고 내 눈은 당황함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디지?---누구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잠시 후에야 그 소리가 오디오에서 나오는 글렌 굴드의 음성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연주하는 동안 억제 할 수 없이 감정이 고조되어 멜로디를 따라 부르던 목소리가 녹음된 것이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 글렌 굴드(1932~1982)는 세 살 때 벌써 악보를 읽었다고 한다. 5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그는 숱한 기행들을 남겼다. 이를테면, 1957년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데뷔 무대를 가졌을 때 연주 2분전에 도착한 그는 마치 북극탐험대원 같은 차림이었다. 여러 겹으로 된 모피외투 밑으로 올이 굵은 모양 없는 스웨터를 껴입고 있었는데 머리카락 역시 엉망으로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그것은 도저히 대중 앞에 나설 연주자의 복장이라 할 수 없었다. 파격적인 그 모습은 지휘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까다롭고 섬세한 그의 연주 수칙은 ‘자기가 연주하고 싶은 곡만 연주할 것’ 과 ‘놀라운 기교를 발휘하는 소절을 듣고 싶어 안달하는 청중의 기대에 굴복하지 말 것’ 이었다.
그의 연주는 듣는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32세, 성공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돌연 대중 앞에서의 연주를 접었다. ‘연주회 중에 조는 사람들, 연주회에 참석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 거기 와 있는 사람들, 연주가 끝나고 뜨거운 박수를 보내겠다는 열의에 차 있는 사람들로부터 도망가기’를 원했다. 한때 그는 연주장에서 일체의 감정의 표시나 박수를 못 치게 하는 ‘굴드안’ 을 작성한 적도 있다. 평온과 고요 속에서 대중과 일치된 감정으로 연주할 수 없는 속물적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던 그는 대중연주를 끊어버리고 오직 녹음을 통해서만 완전한 음악을 보여주려고 했다.
굴드가 유난히 내게 특별했던 것은 대중의 사랑으로부터 죽자고 도망쳤던 기이한 태도였다. 대문의 문패를 떼 내고, 인터뷰는 전화로만 했으며, ‘사랑 받지 않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학연, 지연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분리를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정작 쏟아야 할 정열과 관심, 그리고 정작 들어야 할 소중한 내면의 소리보다는 남의 시선과 평판을 더 의식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렌 굴드같은 천재적인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을 책임져야 할 예술가가
아니겠는가. 내 머리맡의 글렌 굴드는 우리가 때때로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쳐주곤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05년 9월 호에서>
지난 동안거 결젯날 절에서 늦게까지 일을 보고 내 거처로 돌아올 때였다. 오전에 비가 내렸다가 오후에는 개었는데,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 접경에 들어서자 예전 표현으로 맷방석 만한 보름달이 떠올랐다. 보름달을 안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 충만하여 마치 달을 향해 우주비행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늦은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그와 같은 환상적인 우주비행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의 피곤이 말끔히 가실 만큼 산뜻한 귀로였다.
늦은 시간에 돌아오니 적막강산에도 달빛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뜰은 달빛으로 인해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서둘러 난로에 장작을 지펴 잠든 집을 깨웠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내 몸 하나 기댈 곳을 찾아 이런 산중에까지 찾아드는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이 또한 내가 일찍부터 익힌 업이 아닐까 싶다. 다리 밑에서 거적을 뒤집어쓰고 사는 거지도 제멋에 산다고 하니까.
한 어머니는 가로, 세로 각각 1미터 80센티미터 되는 한 평의 공간에서 요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아들이 공부하러 떠나고 난 뒤 그가 거처하던 방을 이리저리 정리하고 보니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틈새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평소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맨 먼저 기도실을 만들어 불화를 걸고 향로와 촛대를 올려놓고 화병에 꽃을 꽂아 아침마다 그 앞에서 기도를 한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남의 이목에 신경 쓸 것 없이 기도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의 변화를 염불이나 독경 소리에 담아 삭여버린다.
두 번째는 화실 만들기. 컴퓨터 프린터가 있는 책상의 한쪽을 이용해서 화판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 스케치북과 화구를 놓아두니 열 평의 화실이 부럽지 않은 공간이 된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남겨준 한 평의 공간에서 이렇듯 조촐한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다. 작고 비좁은 곳에서도 살 줄 아는 사람은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북인도의 오지인 라다크 지방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한 티베트 노인은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아마도 당신들은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이 너무 많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겨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불행한 것은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도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의 가슴을 찌르는 명언이다. 물건과 재산만으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은 예전에 비해 많은 물건과 편의시설 속에서 영양분도 많이 섭취하면서 잘 먹고 잘 입고 번쩍거리면서 산다. 그러나 만족할 줄도, 행복할 줄도 모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률도 높다.
티베트 노인의 말처럼 현대인들이 불행한 것은 모자라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째서 그토록 넓고 크고 많은 것이 필요한가.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옛사람의 지혜를 오늘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에 의해 내 인간 가치가 매겨진다.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사람됨이다.
새 천년이 온다고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떠들썩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달력이 한 장밖에 남지 않은 12월이다. 저마다 오던 길이 되돌아보이는 길목.
나에겐 지난 한 해 동안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스스로 묻는 그런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12월을 가리켜 말수가 적어진 침묵의 달이라고도 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몇몇 곳에 다녀온 일이 떠오른다. 몽골의 황량한 사막 지대와 동토의 땅, 시베리아를 지나 우랄 산맥을 넘고 볼가 강을 건너는 길을 봄, 가을 두 차례 오고갔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태평양 건너 옛 인디언의 땅 미대륙의 동부를 다녀오기도 했다.
가는 데마다 우리말과 우리 음식과 우리 생활 습관이 있어 지구가 한 동네임을 실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국제 사회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움츠린 채 살고 있다. 어째서 그런지 그 까닭이 화두처럼 다가선다.
무릇 인간관계란 신의와 예절로써 이루어진다고 평소에 생각해 온 바이지만 우리는 신의와 예절이 모자란다. 그것도 수준 이하로 많이 모자란다. 그래서 남들은 우리를 선뜻 신뢰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경제 상태가 다시 어려워진 것도 정부와 기업뿐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신의와 예절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데 그 까닭이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 겨울,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첫걸음부터 내딛어야 할 상황에 이른 것 같다.
1959년 티베트에서 중국의 침략을 피해 80이 넘은 노스님이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 왔었다. 그때 기자들이 놀라서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험준한 히말라야를 아무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까?”
그 노스님의 대답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자신의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단다.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걸음 내딛으면서 산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내딛느냐에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을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가.
늦은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그와 같은 환상적인 우주비행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의 피곤이 말끔히 가실 만큼 산뜻한 귀로였다.
늦은 시간에 돌아오니 적막강산에도 달빛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뜰은 달빛으로 인해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서둘러 난로에 장작을 지펴 잠든 집을 깨웠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내 몸 하나 기댈 곳을 찾아 이런 산중에까지 찾아드는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이 또한 내가 일찍부터 익힌 업이 아닐까 싶다. 다리 밑에서 거적을 뒤집어쓰고 사는 거지도 제멋에 산다고 하니까.
한 어머니는 가로, 세로 각각 1미터 80센티미터 되는 한 평의 공간에서 요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아들이 공부하러 떠나고 난 뒤 그가 거처하던 방을 이리저리 정리하고 보니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틈새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평소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맨 먼저 기도실을 만들어 불화를 걸고 향로와 촛대를 올려놓고 화병에 꽃을 꽂아 아침마다 그 앞에서 기도를 한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남의 이목에 신경 쓸 것 없이 기도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의 변화를 염불이나 독경 소리에 담아 삭여버린다.
두 번째는 화실 만들기. 컴퓨터 프린터가 있는 책상의 한쪽을 이용해서 화판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 스케치북과 화구를 놓아두니 열 평의 화실이 부럽지 않은 공간이 된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남겨준 한 평의 공간에서 이렇듯 조촐한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다. 작고 비좁은 곳에서도 살 줄 아는 사람은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북인도의 오지인 라다크 지방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한 티베트 노인은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아마도 당신들은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이 너무 많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겨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불행한 것은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도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의 가슴을 찌르는 명언이다. 물건과 재산만으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은 예전에 비해 많은 물건과 편의시설 속에서 영양분도 많이 섭취하면서 잘 먹고 잘 입고 번쩍거리면서 산다. 그러나 만족할 줄도, 행복할 줄도 모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률도 높다.
티베트 노인의 말처럼 현대인들이 불행한 것은 모자라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째서 그토록 넓고 크고 많은 것이 필요한가.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옛사람의 지혜를 오늘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에 의해 내 인간 가치가 매겨진다.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사람됨이다.
새 천년이 온다고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떠들썩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달력이 한 장밖에 남지 않은 12월이다. 저마다 오던 길이 되돌아보이는 길목.
나에겐 지난 한 해 동안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스스로 묻는 그런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12월을 가리켜 말수가 적어진 침묵의 달이라고도 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몇몇 곳에 다녀온 일이 떠오른다. 몽골의 황량한 사막 지대와 동토의 땅, 시베리아를 지나 우랄 산맥을 넘고 볼가 강을 건너는 길을 봄, 가을 두 차례 오고갔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태평양 건너 옛 인디언의 땅 미대륙의 동부를 다녀오기도 했다.
가는 데마다 우리말과 우리 음식과 우리 생활 습관이 있어 지구가 한 동네임을 실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국제 사회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움츠린 채 살고 있다. 어째서 그런지 그 까닭이 화두처럼 다가선다.
무릇 인간관계란 신의와 예절로써 이루어진다고 평소에 생각해 온 바이지만 우리는 신의와 예절이 모자란다. 그것도 수준 이하로 많이 모자란다. 그래서 남들은 우리를 선뜻 신뢰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경제 상태가 다시 어려워진 것도 정부와 기업뿐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신의와 예절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데 그 까닭이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 겨울,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첫걸음부터 내딛어야 할 상황에 이른 것 같다.
1959년 티베트에서 중국의 침략을 피해 80이 넘은 노스님이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 왔었다. 그때 기자들이 놀라서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험준한 히말라야를 아무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까?”
그 노스님의 대답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자신의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단다.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걸음 내딛으면서 산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내딛느냐에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을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가.
기다리듯이 농사일에 눈코 뜰새 없는 우리는 비오는 날만 기다린다. 우리 어렸을 때 공사판에서 날품을 팔던 아저씨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 가사에도 있듯이 ‘우리가 놀면 놀고 싶어서 노나. 비 오는 날이면 공치는 날이지’ . 요즈음처럼 땡볕에서 밭에 나가 사는 날이 계속되다 보면 비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더 절실하다. 밭에 심어놓은 곡식이나 야채가 목말라 하거나 땅속에서 비를 기다리는 씨앗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지난 여름에 우리 변산공동체 식구들은 여름 내내 아침을 걸렀다. 아침에 배를 비우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나마 시원해서 일하기 덜 힘드는 때가 아침 이른 시간이거나 해가 뉘엿뉘엿 해지는 저녁 무렵인데, 아침 밥상머리에서 그 서늘한 때를 허송하는 게 영 아까웠기 때문이다. 아침에 우는 새도 배가 고파 운다는 데, 한창 때라서 돌이라도 삭일 위장을 지닌 젊은이들이 스스로 그런 결정을 하는 데는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올 여름에는 아마 상황이 바뀔 듯싶다. 지난 여름에는 '잡초’들과 전쟁을 했는데 올해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잡초’들과 날마다 땡볕 속에서 싸워야 할 상황이 빚어졌던 것은 우리가 가꾸는 농작물들이 ‘잡초’와 공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잡초’라고 여겼던 것이 농사의 훼방꾼이 아니라 자연이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땅에 뿌려준 고마운 먹이라면 어떨까? 따로 가꾸지 않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자라는 약초나 나물의 일종이라면? 올 이른 봄에 겪었던 ‘잡초’ 사건이 기억난다. 마늘밭을 온통 풀밭으로 바꾸어놓은 그 괘씸한 ‘잡초’들을 죄다 뽑아던져 썩혀버린 뒤에야 그 풀들이 ‘잡초’가 아니라 별꽃나물과 광대나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정갈하게 거두어서 나물도 무쳐 먹고 효소식품으로 바꾸어도 좋을 약이 되는 풀들을, 내 손으로 그 씨앗을 뿌리지 않았는데도 돋아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대시하여 죄다 수고롭게 땀 흘려가며 뽑아서 버렸으니 어리석기도 하지.
정말 ‘잡초’가 두렵다면 ‘잡초’와 공존 할 수 있거나 ‘잡초’를 이겨낼 농작물을 심고 가꾸면 된다. 밭에 보리와 밀을 심었더니 ‘잡초’ 걱정이 덜하다. 그렇다고 한해 내내 밀 보리 농사를 지을 수는 없으니 다른 방법도 강구해야겠지. 논에 오리나 우렁이를 풀어놓아 ‘잡초’를 먹고 자라게 하는 농사법도 유기농을 하는 분들 사이에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리도 올해는 논에 우렁이를 길러 벼농사 겸 우렁이 농사를 하기로 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논이나 밭에서 자라는 ‘잡초’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아 그것이 정말 잡초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나물과 약초인데도 몰라서 그냥 ‘잡초’로 치부해버리는 것인지 판가름하는 것이다. ‘잡초’로 알았던 것이 잡초가 아니라면 땡볕을 무릅쓰고 풀이 돋아나자마자 호미로 긁어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지렁이가 우글거리는 살아 있는 땅에서 저절로 자라는 풀들 가운데 대부분은 잡초가 아니다. 망초도 씀바귀도 쇠비름도 마디풀도 다 나물 거리고 약초다.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세상에서는 ‘잡초 같은 인생’을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여름에 우리 변산공동체 식구들은 여름 내내 아침을 걸렀다. 아침에 배를 비우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나마 시원해서 일하기 덜 힘드는 때가 아침 이른 시간이거나 해가 뉘엿뉘엿 해지는 저녁 무렵인데, 아침 밥상머리에서 그 서늘한 때를 허송하는 게 영 아까웠기 때문이다. 아침에 우는 새도 배가 고파 운다는 데, 한창 때라서 돌이라도 삭일 위장을 지닌 젊은이들이 스스로 그런 결정을 하는 데는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올 여름에는 아마 상황이 바뀔 듯싶다. 지난 여름에는 '잡초’들과 전쟁을 했는데 올해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잡초’들과 날마다 땡볕 속에서 싸워야 할 상황이 빚어졌던 것은 우리가 가꾸는 농작물들이 ‘잡초’와 공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잡초’라고 여겼던 것이 농사의 훼방꾼이 아니라 자연이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땅에 뿌려준 고마운 먹이라면 어떨까? 따로 가꾸지 않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자라는 약초나 나물의 일종이라면? 올 이른 봄에 겪었던 ‘잡초’ 사건이 기억난다. 마늘밭을 온통 풀밭으로 바꾸어놓은 그 괘씸한 ‘잡초’들을 죄다 뽑아던져 썩혀버린 뒤에야 그 풀들이 ‘잡초’가 아니라 별꽃나물과 광대나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정갈하게 거두어서 나물도 무쳐 먹고 효소식품으로 바꾸어도 좋을 약이 되는 풀들을, 내 손으로 그 씨앗을 뿌리지 않았는데도 돋아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대시하여 죄다 수고롭게 땀 흘려가며 뽑아서 버렸으니 어리석기도 하지.
정말 ‘잡초’가 두렵다면 ‘잡초’와 공존 할 수 있거나 ‘잡초’를 이겨낼 농작물을 심고 가꾸면 된다. 밭에 보리와 밀을 심었더니 ‘잡초’ 걱정이 덜하다. 그렇다고 한해 내내 밀 보리 농사를 지을 수는 없으니 다른 방법도 강구해야겠지. 논에 오리나 우렁이를 풀어놓아 ‘잡초’를 먹고 자라게 하는 농사법도 유기농을 하는 분들 사이에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리도 올해는 논에 우렁이를 길러 벼농사 겸 우렁이 농사를 하기로 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논이나 밭에서 자라는 ‘잡초’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아 그것이 정말 잡초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나물과 약초인데도 몰라서 그냥 ‘잡초’로 치부해버리는 것인지 판가름하는 것이다. ‘잡초’로 알았던 것이 잡초가 아니라면 땡볕을 무릅쓰고 풀이 돋아나자마자 호미로 긁어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지렁이가 우글거리는 살아 있는 땅에서 저절로 자라는 풀들 가운데 대부분은 잡초가 아니다. 망초도 씀바귀도 쇠비름도 마디풀도 다 나물 거리고 약초다.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세상에서는 ‘잡초 같은 인생’을 찾아보기 힘들다.
변산 가는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낡은 말과 글의 굳어져버린 껍질을 깨고, 말과 글, 그리고 거기에 비친 생각과 느낌의 새로운 결을 드러내고, 그 생각과 느낌을 뒷받침하는 삶의 새순을 키워내는 사람이다. 죽어버린 말과 글의 질서에 매달려 예쁜 시어로 꾸미기나 하는 사람은 참 시인이 아니다. 참 시인은, 비유하자면 운수 행각을 하는 떠돌이 중이나 제대로 농사짓는 농부와 같은 사람이다. 운수 행각을 하는 중들은 이틀 밤을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벌써 하룻밤을 지나면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낯익은 것으로 바뀌어 있고, 그렇게 되면 주변 사물에 관심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늘 낯선 것 사이에서 온몸과 마음을 활줄처럼 팽팽하게 긴장시켜 주위의 모든 것에 주의 깊은 관섭을 기울여 접촉하는 자세, 새롭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늘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렇게 해서 온몸과 가슴이 새로움으로 가득차게 함. 이것이 길 걷는 사람의 마음 가짐이고 시인의 눈이다.
삶은 늘 새로운 것이다. 낯익은 것, 편안한 것, 익숙한 것이 생겨난다는 것은 머문다는 것,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느슨해진다는 것, 타성에 젖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죽음에 길든다는 것이다. 어린애의 눈은 늘 호기심에 차 있다. 살아 있다. 이 눈을 가져야 시인이 될 수 있다. 늘 새로운 느낌, 새로운 눈으로 세상과 만나는 사람이 시인이다. 참 농사꾼도 마찬가지다. 진짜중도 마찬가지고…. 시가 마침내 다닫는 궁극지점은 깨우침의 순간 중들이 읊는 오도송(悟道頌 깨우침의 노래)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깨우침의 노래는 낡은 말과 글의 질서 속에서 말뜻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나 사고나 느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된 표현으로 가득 차있다. 삶의 흐름이란 그런 것이다. 순간순간 비약이고 창조다. 이미 만들어진 어떤 그물로도 그 살아 뛰는 고기는 건져올릴 수 없다. 사랑이 삶의 궁극 표현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세상은 사랑이 없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세상과 딴판이기 때문이다. 낯설게 만들기, 낯선 세상 속에서 낯선 나그네로 살아가기, 끊임없이 사랑 속에서 일을 놀이로 만들기, 그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와 고통을 온 가슴으로 끌어안기.
버스에서 내려 걸어오면서 춤을 추었다. 춤추는 내 그림자를 보면서 내가 참 춤을 잘 추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춤의 최고 경지가 원효가 추었다는 무애춤이다. 달빛과도 놀고, 가로등 불빛과도 놀고, 겨드랑이로 스미는 초가을 산들바람에도 어깨가 들리고 개구리와 풀벌레 울음에도 발걸음이 그때마다 달리 건들거리고….
아이들에게 식물도감이나 약초도감에 나오는 풀이나 나무 이름을 일러주어 무엇하리. 예쁜 풀, 마음에 드는 나무를 보면 냄새도 맡아보고 맛도 보고 올라가보기도 하고 꺾어보기도 하면서 스스로 이름을 짓게 만들고 나중에 그 나무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는지도 가르쳐주어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풀이나 나무 이름이 마음에 안 들거든 새로 지은 예쁜 이름으로 그 풀과 나무를 부르도록 하자. 새 이름을 붙이고 새 이웃을 만들고 그 새로운 관계의 그물을 새로 떠서 살아 생동하는 생명의 고기를 건져올리게 하자. 죽은 세상을 산세상으로 바꾸는 길이 그 길이 아니랴. 96년 8월 26일
삶은 늘 새로운 것이다. 낯익은 것, 편안한 것, 익숙한 것이 생겨난다는 것은 머문다는 것,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느슨해진다는 것, 타성에 젖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죽음에 길든다는 것이다. 어린애의 눈은 늘 호기심에 차 있다. 살아 있다. 이 눈을 가져야 시인이 될 수 있다. 늘 새로운 느낌, 새로운 눈으로 세상과 만나는 사람이 시인이다. 참 농사꾼도 마찬가지다. 진짜중도 마찬가지고…. 시가 마침내 다닫는 궁극지점은 깨우침의 순간 중들이 읊는 오도송(悟道頌 깨우침의 노래)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깨우침의 노래는 낡은 말과 글의 질서 속에서 말뜻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나 사고나 느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된 표현으로 가득 차있다. 삶의 흐름이란 그런 것이다. 순간순간 비약이고 창조다. 이미 만들어진 어떤 그물로도 그 살아 뛰는 고기는 건져올릴 수 없다. 사랑이 삶의 궁극 표현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세상은 사랑이 없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세상과 딴판이기 때문이다. 낯설게 만들기, 낯선 세상 속에서 낯선 나그네로 살아가기, 끊임없이 사랑 속에서 일을 놀이로 만들기, 그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와 고통을 온 가슴으로 끌어안기.
버스에서 내려 걸어오면서 춤을 추었다. 춤추는 내 그림자를 보면서 내가 참 춤을 잘 추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춤의 최고 경지가 원효가 추었다는 무애춤이다. 달빛과도 놀고, 가로등 불빛과도 놀고, 겨드랑이로 스미는 초가을 산들바람에도 어깨가 들리고 개구리와 풀벌레 울음에도 발걸음이 그때마다 달리 건들거리고….
아이들에게 식물도감이나 약초도감에 나오는 풀이나 나무 이름을 일러주어 무엇하리. 예쁜 풀, 마음에 드는 나무를 보면 냄새도 맡아보고 맛도 보고 올라가보기도 하고 꺾어보기도 하면서 스스로 이름을 짓게 만들고 나중에 그 나무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는지도 가르쳐주어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풀이나 나무 이름이 마음에 안 들거든 새로 지은 예쁜 이름으로 그 풀과 나무를 부르도록 하자. 새 이름을 붙이고 새 이웃을 만들고 그 새로운 관계의 그물을 새로 떠서 살아 생동하는 생명의 고기를 건져올리게 하자. 죽은 세상을 산세상으로 바꾸는 길이 그 길이 아니랴. 96년 8월 26일
요즘은 매봉 전철역을 출 퇴근길에 이용하고있다. 도곡역에서 매봉역으로 옮긴 이유는 거리로는 전철 반정거장 정도를 더 걸어야 하지만, 가로수로 심겨진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와 아파트 담장 너머로 싱싱한 푸르름을 자랑하고있는 느티나무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출근길 도곡역에서 회사에 이르는 인도는 제법 복잡하기도 하도, 늘 맞바람 치는 길목에 아침부터 신경이 쓰일 정도로 남을 괴롭히는 애연가가 너무 많기에 어느 날 슬그머니 매봉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매봉역에서 회사까지는 10분 정도 걸리는데, 도중에는 건널목이 있어 잠시 한쪽으로 기울었던 생각을 제자리로 되돌리게 해주는 정신 정거장(?) 노릇을 해 주고 있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잠시나마 짙은 초록 아래를 걸으며 하루 계획을 꾸리고, 퇴근길에는 사무실에서 보낸 하루를 이리 저리 되돌아볼 수도 있으니 짧은 거리이기는 하나 걷기 운동까지 하게 해주는, 일거삼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구청에서 태풍피해를 예방해야 한다고 양버즘 나무를 기계톱으로 마구 쳐내서 항암제를 맞는 말기 암환자의 머리모양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다지 큰 나무들도 아니었는데... 이젠 하늘이 훤히 내다보이는 볼품없는 출근길로 전락해버려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없다. 집안에 키우는 화분도 작을 때는 너무 작다고 빨리 크기만을 기다리다가, 훌쩍 커버린 뒤로는 화분무게에 쩔쩔매게 되면서 오히려 부담이 되어 눈총을 주게 되기 마련인데, 가로수도 같은 처지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초록만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천천히 자라며 그 키를 지키고 있었다면 톱 세례는 면할 수 있었겠지만 반대로 잘 안 크는 종자라면 가로수로 선택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가로수로 자리잡고 있는 마로니에도 곧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너무 잘 나가면 시샘을 해 자리에서 가차 없이 밀쳐내는 정치인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이젠 하루 빨리 새 가지가 돋아나 다시 초록으로 하늘을 덮어 주기만을 기다릴 따름이다.
출근길 도곡역에서 회사에 이르는 인도는 제법 복잡하기도 하도, 늘 맞바람 치는 길목에 아침부터 신경이 쓰일 정도로 남을 괴롭히는 애연가가 너무 많기에 어느 날 슬그머니 매봉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매봉역에서 회사까지는 10분 정도 걸리는데, 도중에는 건널목이 있어 잠시 한쪽으로 기울었던 생각을 제자리로 되돌리게 해주는 정신 정거장(?) 노릇을 해 주고 있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잠시나마 짙은 초록 아래를 걸으며 하루 계획을 꾸리고, 퇴근길에는 사무실에서 보낸 하루를 이리 저리 되돌아볼 수도 있으니 짧은 거리이기는 하나 걷기 운동까지 하게 해주는, 일거삼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구청에서 태풍피해를 예방해야 한다고 양버즘 나무를 기계톱으로 마구 쳐내서 항암제를 맞는 말기 암환자의 머리모양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다지 큰 나무들도 아니었는데... 이젠 하늘이 훤히 내다보이는 볼품없는 출근길로 전락해버려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없다. 집안에 키우는 화분도 작을 때는 너무 작다고 빨리 크기만을 기다리다가, 훌쩍 커버린 뒤로는 화분무게에 쩔쩔매게 되면서 오히려 부담이 되어 눈총을 주게 되기 마련인데, 가로수도 같은 처지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초록만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천천히 자라며 그 키를 지키고 있었다면 톱 세례는 면할 수 있었겠지만 반대로 잘 안 크는 종자라면 가로수로 선택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가로수로 자리잡고 있는 마로니에도 곧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너무 잘 나가면 시샘을 해 자리에서 가차 없이 밀쳐내는 정치인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이젠 하루 빨리 새 가지가 돋아나 다시 초록으로 하늘을 덮어 주기만을 기다릴 따름이다.
부석사는 언제 가 보아도 정말 잘 자리잡은 절터라고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언제인지 보수를 하면서 지붕을 모두 무더기로 대량 생산된 기와로 바꿔서 머리를 까맣게 염색을 한 노인네를 만들어 버렸다. 오래 전 우리 애들 초등학교시절 들렀을 때 느꼈던 고색 창연함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크고 작은 돌을 조화롭게 쌓은 의젓한 모습의 석축은 아직 그대로 대부분 남아있다.
문화재청 장관으로 학자 출신이고, 그래도 그런 방면에서는 제법 글 솜씨도 있고, 눈썰미도 남다른 인물이 임명된 이후에도 문화재 관리는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으니 너무도 안타까운 노릇이다.
서울의 고궁도 복원을 하네 어쩌네 하면서, 온몸으로 땀 흘려 만든 기와를 모두 갈아치우고 있어서 이젠 이끼 덮여 세월을 느끼게 해주는 운치도 모두 사라지고 있다. 물론 전통기와를 쓰려면 기계식 기와보다 생산성도 떨어지고, 보수비용도 훨씬 더 들기는 하겠지만, 경복궁 입장료를 3천 얼마로 마구 올려가며 거둔 돈을 그렇게 써버리는 짓은 이젠 멈추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부석사 무량수전 (최순우 님)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민족이 오래 보존해온 목조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됨 건물임이 틀림 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보아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 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 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 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크고 작은 돌을 조화롭게 쌓은 의젓한 모습의 석축은 아직 그대로 대부분 남아있다.
문화재청 장관으로 학자 출신이고, 그래도 그런 방면에서는 제법 글 솜씨도 있고, 눈썰미도 남다른 인물이 임명된 이후에도 문화재 관리는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으니 너무도 안타까운 노릇이다.
서울의 고궁도 복원을 하네 어쩌네 하면서, 온몸으로 땀 흘려 만든 기와를 모두 갈아치우고 있어서 이젠 이끼 덮여 세월을 느끼게 해주는 운치도 모두 사라지고 있다. 물론 전통기와를 쓰려면 기계식 기와보다 생산성도 떨어지고, 보수비용도 훨씬 더 들기는 하겠지만, 경복궁 입장료를 3천 얼마로 마구 올려가며 거둔 돈을 그렇게 써버리는 짓은 이젠 멈추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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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최순우 님)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민족이 오래 보존해온 목조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됨 건물임이 틀림 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보아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 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 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 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